예수님과 위대한 대화

예수님과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과의 대화

차작가 2023. 11. 1. 12:59
출처: 구글이미지

 

예수님과 위대한 대화 17: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 (요 9:1-41)

제목: 진정한 구원 그리고 그 이후의 삶

9: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9: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9: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9: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9:8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9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9:10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9:11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9:12 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9:13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9:14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9:15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니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9:16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9:17 이에 맹인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9:18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9:19 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

9:20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9:21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9: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 이러라

9:23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 보소서 하였더라

9:24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9:25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9:26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9:27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9:28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9:29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9:30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9:31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9:32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9:33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9:34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서론)

예수님과 위대한 시리즈를 시작할 때 나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의 사람들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려고 했다.

실제로 예수님을 만나고 대화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오늘의 주인공은 아마도 가장 극적인 변화를 경험한 사람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왜냐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나고서는 눈을 뜨게 되고 게다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1. 이 맹인을 만나게 되는 배경:

예수님이 초막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명절 행사를 다 마치시고 성전 뜰에서 간음 현장에서 붙잡혀 온 한 여인을 구원해 주신 다음, 바리새인들과 더불어 긴 논쟁을 하신 후, 성전에서 나와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다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는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게 된다.

2. 맹인이 치유함을 받고 사람들에게 간증함

이 맹인 이야기로부터 우리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구원관과 영적인 눈을 뜨게 된 구원 받은 백성의 삶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1) 구원의 시작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고 구원의 주권 역시 하나님이 갖고 계신다는 것이다.

본문 1절에 나오는 맹인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으므로 빛에 대한 경험도 없고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기 때문에 다른 맹인들과는 달리 보고자 하는 소망이나 눈을 뜨고자 하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도 않았다. 아예 예수님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런 맹인에게 예수님은 먼저 관심을 가지셨고 먼저 그를 보셨다는 것이 중요하다.

영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들도 본문에 나온 맹인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면 (죄인 된 몸으로 태어나서) 아무 소망도 없고 구원이 무엇이며 하늘나라가 무엇이고 영생이 무엇인지도 전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적으로 맹인이었던 우리에게 예수님이 먼저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맹인을 먼저 보신 것처럼 우리들에게 먼저 찾아오셨다. 롬 5:8 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증거하고 있다.

본문의 맹인은 눈으로 본 경험이 없었고 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이고 중요하며 축복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눈을 뜰 필요성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우리들도 이와 같이 구원과 영생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구원과 영생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셨다.

엡 2:8~9에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의 노력이 아닌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신 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36절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어서 1) 또한 이 맹인에는 빛의 필요성이 없다. 이 맹인에게 우리가 빛의 중요성에 대해 아무리 설명해도 피부로 느낄 수 있을까?

(어떤 물리학자가 빛의 파동설과 입자설) 아무리 장황한 설명을 해도 그 맹인에게는 별로 피부에 와닿지 않을 것이다. 이 맹인에게 빛의 중요성을 알 수 있게 하는 방법은 딱 한 가지 눈을 뜨게 해서 실제로 보게 하는 방법 밖에는 없을 것이다.

사실 누가 더 답답하게 느끼고 있는가? 맹인보다는 우리가 아닐까? 예수 믿지 않는 자 들을 보는 심정을 우리는 안다.

우리도 마찬가지였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아무리 예수님과 천국에 대해 설명을 해도 알아들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의 심령 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해 주시니깐 그 십자가의 구속 사역이 믿어지고 또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었다.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해 주시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다.

본문 1절에서 예수님이 보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맹인은 결국에는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예수님의 전적인 주권으로 눈을 뜨게 됨을 보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과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로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1절과 같이 예수님이 그를 보신 것과 같이 35절에서 그 사람이 쫓겨났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오신 예수님. 이것은 하나님의 주도권을 말한다. 구원의 시작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 맹인이 먼저 찾지 않았다. 예수님이 먼저 찾은 것이다.

눅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마 18:12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2) 하나님의 주도권도 중요하지만 영안이 열리고 진정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주도권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믿음이 필요하다.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지만 사람의 반응도 필요하다. 이것이 구원에 있어서 균형이라고 한다. 36절에서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고백이 필요하다

믿음이 구원에 있어서 필요조건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예정되었고 선택받았다 하더라도 아무리 생명의 책에 여러분의 이름이 기록되었다 하더라도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여전히 우리의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로마서 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아무리 하나님께서 구원의 주도권을 가지고 계시지만 우리 인간들의 반응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균형이라는 것이다.

구원은 반드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믿음이라는 양쪽 면을 가지고 있다.

 

37절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38절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 아니이까 하니(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 이렇게 구원받은 후 다음 단계는 바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의 모습이다.

37절 예수님을 닮아 간다는 것이다.

고후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4) 그다음 단계는 예배이다.

38절에 보니 그 맹인이 예수님께 절했다. 경배, 예배했다는 것이다.

8장 59절의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돌로 치려 했던 것과는 정 반대의 일이다.

(이 맹인의 극적인 이야기가 주는 교훈)

예수님이 먼저 이 맹인을 찾아가고 이 맹인은 예수님에 의해서 눈을 뜨게 되었다. 그리고 이 맹인은 친구들에게 가서 간증하고 바리새인들에게 잡혀서 그 사회로부터 배척 당하고 다시 예수님께 붙들려서 예수님께 절하고 경배했다.

이 이야기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영적 여정과 같음을 알 수 있다. 우리도 예수님 때문에 영적인 눈을 뜨게 되고 그런 다음 다른 사람에게 가서 증언하고 나눈 다음 세상으로부터 무시당하거나 배척 당하고 결국은 예수님 발 앞에 무릎 꿇고 예배하는 모습이 그 맹인과 똑같음을 알 수 있다.

 

줄거리 요약:

예수님이 초막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명절 행사를 다 마치시고 성전 뜰에서 간음 현장에서 붙잡혀 온 한 여인을 구원해 주신 다음 바리새인들과 긴 논쟁을 하신 후 성전에서 나와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다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는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게 된다.

이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부모 때문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죄 때문입니까?"

하고 묻는다. 예수님은 " 이 사람은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야!" 하고 대답하신다.

그러곤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맹인의 눈에 바르고 "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신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맹인은 실로암 연못에 가서 눈을 씻으니 눈이 밝히 보이고 되었다.

이웃 사람들과 전부터 그 맹인이 걸인 난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눈을 뜬 맹인을 보며

" 아니! 저 사람은 성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맹인이 아니냐!" 하며 놀랐다.

그래서 사람들이 " 어떻게 너는 보게 되었니? 어떻게 눈을 뜬것이냐?" 하고 묻자

"예수라 하는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그대로 했더니 글쎄 눈이 보이지 않겠어!"

하고 말했다.

그들이 " 그럼 그 예수라 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물었지만

맹인 되었을 때 예수님을 보지 못했기에 알지 못했다.

사람들은 맹인 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다.

그리고 바리새인들도 늘 성전 앞에서 구걸하던 맹인이었던 사람을 보며 놀라며 " 너는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느냐?" 하고 물었다.

맹인이었던 그 사람을 다시 자신이 눈을 뜨게 된 경위를 그대로 말해 주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일부는 안식일에 고친 예수님을 안식일에 일을 할 수 없는데 율법을 어겼으므로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였고 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죄인으로서 이러한 표적을 행할 수 있겠느냐며 눈을 뜨게 된 맹인에게 일어나 기적을 두고 서로 논쟁을 하였다.

그들은 다시 맹인이었었던 사람에게 "그 사람이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었다.

그는 "선지자 니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바리새인들은 믿지 못하고 다시 그 맹인이었었던 사람의 부모를 불러서 " 이 사람이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너의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의 부모가 대답하여"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 누가 눈을 뜨게 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내 아들에게 직접 물어보셔서 그가 이미 장성했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라고 말했다. 그 부모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 당하기 때문이었다.

바리새인들은 다시 맹인이었던 사람을 불러 "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예수가 죄인인 줄 아노라"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맹인이었던 사람은 "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다."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다시 "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하고 물었다.

다시 대답하되" 내가 이미 내가 눈을 뜨게 된 일을 말해도 듣지 않으면서 어째서 다시 듣고자 합니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고 합니까?"

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욕하면서 " 너는 그의 제자이니 우리는 모세의 제자다.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 알거니와 예수는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 "라고 말했다. 그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인정하지도 않았고 날 때부터 맹인이었었고 그들이 매일 드나드는 성문 앞에서 구걸하는 맹인이 눈을 뜬 걸 보면서도 그 기적을 믿지도 않았다.

결론:

사람은 날 때부터 영적 맹인이다. 궁극적인 필요를 절대로 발견하지 못한다. 사람은 아담 이래로 하나님을 떠나 죄로 말미암아 그 성정이 부패하여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고’(요한복음 3:3),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일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2:14) 그러므로 ‘참 빛’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영적으로 맹인 된 우리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간청해야 한다. 그러면 그분은 지나가는 발걸음을 멈추시고 영의 눈을 열어 주셔서 날 때부터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영의 세계를 밝히 보는 눈을 얻게 해 주실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우주에 살아계신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보는 눈이 열린다. 그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 주신 사랑의 아버지 이심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 진리의 빛을 통해 참 생명과 인생의 갈 길이 무엇인지를 보는 눈이 주어진다. 이것이 곧 영의 새로 남이며, 그때에 만물은 새롭게 보인다. (김창주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