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서론:
사망의 권세 아래 놓여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자체가 인생 역전이 아니면 무엇일까? 그러나 이런 인생 역전을 경험한 우리의 실제 삶의 모습은 어떠한가? 여전히 죄와 악으로부터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러한 삶을 여전히 살고 있으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 죄와 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고 어떠한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일까?
오늘 읽은 갈 2:20절에서 한글 개역 성경 번역에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번역되어 있지만 원문과 NIV, ESV 번역에는 live by faith in Christ로 번역되어 있다.
아직도 변하지 않는 우리 삶에 대한 답변으로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예수 안에서 믿음이란 말이 선뜻 다가오지 않는다. 먼저, “예수 안에서”란 말의 의미를 알아보자.
예수 안에서의 뜻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이 엡 2:12, 13에 나와 있다.
2:12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성경은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12절에서처럼 예수 밖에 있는 사람(separate from Christ)과 13절처럼 예수 안에 있는 사람(in Christ)이다.
예수 밖에 있는 사람(separate from Christ)은
1) 하나님이 없는 자(without God): 하나님에 대한 주관적인 체험이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여전히 존재하시는데 예수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느끼지도 못한다.
2) 세상에서 소망이 없는 자(without hope): 세상 것들에 소망을 두고 살지만 궁극적으로는 소망을 얻지 못한다는 뜻이다. 소망을 얻기 위해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가져 보기도 한다. 과학기술에 소망을 두기도 한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 인류가 행복해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고 있음을 경험하고 있다. (IT 기술 발달로 서로 간의 인격적인 대화가 단절)
=> 전도서. 1:2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 말은 세상의 것들에 대해 모든 가능성들을 시험해 보고 생각해 봤지만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다. 세상 것들은 나아질 가망성이 없을 뿐 아니라 사람 역시 더 좋아질 가망이 없다는 솔로몬의 깊은 인생 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반면에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가깝게 된 사람이다. 엡 2:12-13은 예전에 우리가 예수 밖에 있었던 자였는데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이제는 예수 안에 있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소망도 없던 예수 밖에 있던 자가 예수의 피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소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안에서의 뜻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이제는 예수와 함께 하는 것이다. 즉, 예수 안에서의 믿음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믿음(Faith with Christ)이다.
그럼,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 즉, 예수님과 함께 하는 믿음으로 사는 것은 무엇일까?
본론:
1. 그 첫 번째는, 나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확고히 믿는 것이다.
(20절) 이 구절을 읽으면서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수님만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굳이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고 말하고 있을까? 그런,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할 수 있다.
1) 성경은 우리가 원래 어떤 상태였다고 말하고 있나?
A.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말한다. (엡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허물=> 근본을 범하는 것. 즉, 하나님께 대한 반역. 하나님 주권에 대한 반역이다.
죄 => 하나님을 떠난 것. 하나님의 명령과 정반대로 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정해놓은 기준(목표)’에 반하는 모든 것을 죄라고 정의한다.
<죄>라는 단어의 원 뜻이 “과녁을 벗어나다”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과녁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목표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하나님이 인간과 영원히 거하는 것”이다. (엡 1: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였는데 롬 3:23에서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B. 허물과 죄로 인하여 우리 인간은 어떻게 되었나?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냈고 마음의 원하는 대로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예수 밖에 있는 자들)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오게 된다. 본질상=> by nature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의 죄를 용납하시는 분이 아니다. 범죄에는 반드시 형벌이 따른다. 근원적인 죄를 안고 있는 우리를 그대로 두시지 않는다. 결론은 단 한 가지이다. 바로 사형을 선고하신다. 그래서 전에는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표현한 것이다.
2) 하나님은 율법을 근거로 심판하신다.
19절 ‘2: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율법은 인간의 허물과 죄를 들어 유죄로 판정하고 그 형벌로 죽음을 선포한다. 율법이 율법을 어긴 자로서 죽이라고 요구하는데 오직 율법의 요구 사항을 충족시키는 것은 죽음 밖엔 없다. 그런데 나 자신이 죽어야만 한다면 그것은 나 자신에게 진정한 종말이 돼버린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른 방법을 주셨다. 예수님을 변호인으로 세우셨다.
- 하늘 법정에서 예수님이 아무 댓가 없이 변호사로 자처해서 변호하신다.
- 세상 법정에선 서류와 논리 그리고 판례로 변론하지만 하늘 법정에선 예수님 자신의 피와 희생으로 변론하신다.
- 세상 법정에선 변호사가 의뢰인과 생사를 함께 하지 않지만 하늘 법정에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죽고 함께 사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 롬 6:3-5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 그리스도께서 내가 율법을 어긴 것에 대한 형벌을 담당하셨고 내가 그분과 연합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신 일의 축복은 나의 것이 되었다.
=> 이것이 그리스도와 연합의 비밀이다.
6:4에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는 그와 함께 죽었다는 의미이다.
6:6에서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 우리 옛사람(허물과 죄로 인하여 사망 선고받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다.
갈 2:20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도 나의 옛사람이다. 악하고 반항적이고 죄악된 옛날의 나 자신이 응분의 정죄를 받은 것이다. 따라서, 옛날의 나는 더 이상 살아있지 않다.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19절처럼 내가 율법에 대해 죽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어서 6:7에 이렇게 선포하고 있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따라서 고후 5:21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의 공로를 보시고 우리에게 의롭다고 판결을 내려 주셨다.
예수님의 피 때문에 죄가 없다고 여겨 주셨다. 죽었던 자가 이제는 살게 되는 인생의 역전이 일어난 순간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묵상해 봐야 할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 수동태이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나를 그 십자가로 초청해서 예수님이 우리 자신과 함께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말한다.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흔쾌히(willingly, not reluctantly) 인간의 몸을 입으심으로 우리와 연합하셔서 우리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예전에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나를 이제는 그리스도 안으로 나를 초청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 밖에서 있던 우리를 하나님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예배당 밖에 살던 우리를 예배당 안에 들어올 수 있었던 건 말할 수 없는 축복이다. 하나님이 아무 공로 없는 우리를 하나님의 전으로 초청하신 것이다.
2.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 두 번째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을 믿는 것이다.
(현재)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을 믿는 것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 부활의 소망을 갖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것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삶이라면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을 믿는 것은 능력의 삶을 사는 것이다.
옛사람이 못 박혔음을 믿었으면 이제는 못을 박아야 한다.
갈 5: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그들의 육체 또는 죄어 된 성품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말은 타락한 본성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왜냐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아주 잔인한 처형 방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욕심과 함께 그것을 냉혹할 정도로 단호하게 거부해야만 한다. 이것이 우리의 육체에 대해 취해야 할 적극적인 자세이다.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함으로써 우리는 육체의 권세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살고 있다면 성령으로 사는 것이고 성령으로 행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완전한 육신으로 오셨다. 그래서 우리와 같이 배도 고프셨고, 피곤함을 느끼기도 하셨다. 히 4:15에서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도 우리처럼 똑같은 육체의 시험을 받았으나 우리와 다른 점은 그는 죄를 짓지 않았다 라는 점이다. 예수님은 성령을 온전히 의지하셨기에 가능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델이 되신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시험을 받지만 내 안에 계신 성령을 의지하면 능히 죄의 유혹에서 승리할 수 있다. 사탄이 우리를 죄짓도록 강요할 때, 죄의 유혹에 빠지려고 할 때 “예수님! 힘주세요. 이 시험에서 이기게 해 주세요. 나를 힘들게 하는 사탄 마귀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갈 지어다! 라고 선포해야 한다.
결론: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신 것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삶 중심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이 주도적이다.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본다.
찰스 쉘돈 목사님의 In his Step (내가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는 저자가 목사가 되기 전에 실직한 인쇄공 행색을 하여 시가지를 헤맬 때 기독교인들과 목사들의 무관심을 보고 충격을 받아쓴 책이다. 그가 자기 교회 신도들에게 낭독해 주기 위해 쓴 이 책이 주는 유익함은 내게 닥치는 모든 상황들에 대해서 이제는 예수님 중심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직장인과 사업자라면, 출세와 돈벌이를 목적으로 이기주의와 탐욕을 좇아 은밀한 방법으로 부정을 저지르실까? 자신만 주일 성수하고 고용원을 일 시키실까? 예수님이 신문 잡지사 사장이라면, 회사의 돈벌이 때문에 퇴폐풍조와 음주 음란과 과대 선전 기사를 마구 게재하시며 일요판 신문도 발행하실까? 예수님이 출판인과 작가라면, 어떤 책을 펴내실까? 예수님이 재산가라면, 그 재산을 무슨 일에 누구를 위하여 사용하실까? 예수님이 정치가라면, 어떻게 하실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신 것을 믿기 이전에는 모든 걸 나 자신의 생각에 따라 결정했는데 이젠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 계신다는 믿음을 가지니깐 모든 상황에 대해서 예수님 중심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런 모습이 내 안에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생활인 것이다.
이런 믿음의 생활을 지속하게 되면 이제는 예수님이 나를 통제하시고 주장하게 된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나 자신을 통치하는데 어찌 자신을 내어 맡기지 않을 수 있을까? 전적으로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예수님 만을 신뢰하길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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