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실제적인 문제들을 많이 다룬 고린도서는 실천신학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적으로 고린도교회에 당면한 문제를 바울이 서신서로 통해 해결해 가는 것을 보며 안타까웠다.
그들의 문제가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지혜롭게 강약을 조절해 가며 편지를 쓰며 훈계하는 걸 보며 나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10:1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10:2 또한 우리를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는 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10:3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10:4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10: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10:6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사도 바울의 사도직에 반론을 제기하는 고린도 교회에 바울은 변론을 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이 시장의 깡패를 사서 바울을 끌어내
읍장들 앞에 데려가 천하를 어지럽히는 자가 소동을 일으킨다고 고발을 했다.
야손이 보석금을 내어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를 구출하고 디모데와 실라는 그곳에 있고 바울을 아덴으로 데려가 피신을 시킨다.
아덴에서 디모데와 실라를 기다리다가 아덴에서도 복음을 전하고 바울은 바로 고린도로 옮겨 가 그곳에서 로마의 황제 글라우디오가
기독교인들을 추방하자 각처로 흩어졌는데 그중에 고린도로 이주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 개척한 교회가 고린도 교회이다.
천막을 치며 생업을 유지하며 밤낮으로 전도해 세운 교회가 고린도 교회이다.
자기가 개척한 교회에서 사도권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사도 바울에겐 상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고린도 교회에게 정중하고 엄격하게 훈계를 하고 있다.
나는 이 부분에서 바울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무조건 참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과 정정할 것은 정정해야 한다는 것과 교회를 어지럽히는 것에는 경고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엄중하게 고린도 교회에 자신의 정당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항상 실패했는데 요즘은 조금씩 내 의견도 이야기하고 틀린 것은 틀렸다고 말하고 살고 있다.
감정을 다친 바울은 그냥 무시하고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으로 하나님께 맡길 수도 있었을 텐데
사랑하기에 그들에게 기회를 줬던 것이다.
1절에서 너희들이 나를 외모로 판단하는 것 잘 알고 있다.
고린도교회에선 말도 어눌하게 하는데 편지는 담대한 게 이상하다며 비판하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너희들이 그렇게 판단하는 나는 그리스도의 관용과 온유함으로 너희에게 경고한다는 말씀이다.
바울을 함께 대면해 있으면 감정적으로 대할 수 있기에 편지로 하길 원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마음이 격한 채로 대하면 상처가 될 수 있기에 편지로 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겠다는 이야기이다.
육신의 생각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마음 인간적인 마음으로 싸우는 것은 버리고
하나님의 능력은 모든 진도 무너뜨릴 정도로 강하니 자신을 죽이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신을 그리스도께 복종 시키는 것이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능력이므로 하나님께 순종하길 원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오만과 어떠한 계략도 그리스도께 복종시켜야 한다.
우리가 완전히 순종하게 될 때에는 모든 불순종의 진을 무너뜨릴 수 있다.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자부한다면 바울도 그 사람 못지않게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권위는 그들을 망치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고린도 교인을 키워주라고 주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권위를 좀 지나치게 내세운다 해도 그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지금 바울은 고린도에 갈 건데 그리스도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길 원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생활에서 오는 오해는 굳이 지적하고 고치려 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학적인 면에서나 말씀에서 잘못된 것은 사도바울의 방법처럼 치리도 이루어져야 하며
잘못을 알려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신앙생활을 할 때 저건 아닌데... 위험한데...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지만 싸움이 일어날 것 같아 피할 때가 많았었다.
그리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도 그저 입을 닫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바울을 보며 그것은 불법을 동조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일같이 육신으로 행하는 모든 것을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않는 것도 중요한 태도지만
우리가 가진 무기는 어느 견고한 성도 무너뜨리는 무기인 하나님의 능력임을 자각하고 담대함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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