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빌립보서 2장 17~18절

차작가 2024. 4. 10. 10:32

17절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이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보충 설명:

함께 기뻐하리니 2: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여기서 ‘전제’란 고대 제사 의식에서 포도주를 제물에 붓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제물이 죽임을 당하고 신에게 바쳐지기 위해서 불에 태워질 때 포도주를 가져다가 제물 위에 부는 것이다. 결국 포도주는 제물로서 신에게 바쳐지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바쳐지는 제물을 위해서 부어졌던 것이다. 바울은 자신을 그러한 전제로 비유하여 말하고 있다.

바울은 지금 로마에 의해서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위기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바울의 형편을 빌립보의 성도들이 염려하고 걱정하고 있다. 이러한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바울이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빌 1:12)는 말로써 그들을 위로했다.

자신이 어떤 일을 당하든 중요한 것은 복음이 증거 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린다’는 말 역시 같은 의미이다.

이것은 삶에 대한 바울의 인식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내용이다. ‘나의 삶은 여러분의 믿음이라는 제물과 봉사 위에 부어지는 전제와 같은 것일 뿐이다. 그러니 내가 죽고 사는 문제로 염려하지 마십시오’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처럼 빌립보 성도들의 믿음을 위해서 자신이 전제로서 죽고 사라진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기뻐하겠다고 말한다. 바울의 기쁨은 단지 ‘내가 믿음의 일을 했다’는 차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라는 것 때문에 기뻐하는 기쁨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개인의 목숨보다는 빌립보 성도들의 믿음을 더 귀하게 여겼던 것이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예수님에 대한 순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순종은 사도 바울에게 주어진 믿음으로 인해서 맺어진 열매였던 것이다.

적용:

사도 바울은 자신이 받은 고난은 복음 때문이므로 기뻐했다. 자신을 전제로 비유하며 감사하므로 순종하는 모습이 참 감동이다

나는 조금만 억울해도 아파도 참지 못하고 억울해 하는데 .. 역시 바울은 위대하다. 아니.. 바울을 그렇게 만드신 하나님의 뜻이 위대하다.

인생을 돌아보면 그 당시는 죽을 것 같이 힘든 순간이었는데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면 " 아.. 그래서 그러셨구나... 다 하나님 은혜였구나... 내 뜻대로 안 된 게 감사하구나... 그때는 그렇게 된 게 나에겐 최선이었구나.." 하며 감사하게 된다. 거의 99.9%가 그랬었다.

지난 사역을 돌아보니 그렇다.. 그때는 정말 아팠는데..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노인들만 남아 있는 교회.. 덩치는 학교 건물을 사서 세운 교회라 규모가 엄청났었다. 처음 교회 부임할 때는 10쯤 되는 교회였는데 4년이 지나니 한 30명쯤으로 부흥을 했었다. 부흥이라고 하기는 이상하지만 그럭저럭 그렇게 되었다. 그래도 교인의 대부분이 70대라 교회를 운영하는데 문제가 많았었다. 전 사역자의 사례비의 반 정도 밖에 못 드린다며 시작한 사역이라 생활고도 많았었다. 돈이야... 늘 신학생 시절부터 없었던 거라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가난이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지 ... 돈이 있으면 미래를 계산하며 규모를 가지고 살겠지만 줄일 것은 식비밖에 없는 턱없이 부족한 생활비라 정말 하나님께 맡기고 살았다. 그러다 보니 마음이 편했다. 고민해도 방법이 없으면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하며 살았다. 실제로도 그랬다. 그렇게 살아도 꼭 필요한 건 주셨고 굶지도 않았다.

그러던 중 교회의 회계장부를 우연히 보게 되었고 교회의 통장이 6개로 분류가 되어있었고 두 개만 빼고는 교인의 명의가 아니라 처음 보는 사람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쯤에 교회의 관리비가 턱없이 비싸고 헌금은 그에 비해 턱없이 작아서 운영에 어려움이 있다 하여 교회를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기부를 하고 우리 교회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들어가서 같이 윈윈하는 방법으로 사역의 방향을 돌리게 하셨다. 학교 측에서도 만약 건물을 기부하고 마음이 바뀌는 걸 염려해서 5년 동안 함께 살아보고도 기부 의사에 변동이 없으면 기부하고 우리 교회는 학교 건물의 일부를 함께 사용하는 방법으로 계약을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교인들의 마음이 변하고 그놈의 건물 욕심... 죽을 때 가져갈 것도 아닌 건물을 팔아서 기부하지 않고 자신들의 마음에 드는 건물을 사서 이전하는 방법으로 당회장 동의 없이 투표를 하고 결국 우리는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장로 3명이 통보로 교회를 "떠나라"라는 말로 우리는 바로 그달 마지막까지 정리를 하고 교회를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에게 "나가라 ,,,,"라는 말을 한 그 주에 교회에 스프링클러 시스템이 망가져서 지금까지 타운에서 교회를 못 사용하게 해서 지금까지 2년이 넘도록 교회를 아무도 들어 가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다 말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한 교회 건물에 대해 하나님의 다양한 방법으로 보여 주고 계신다.

돌아보니 가슴 아프고 버림받은 그 마음으로 공황장애 우울증 대인기피증 등으로 고생하고 있지만 이 코로나 사태에 그 사역을 이어 가고 있다면 지금은 정말 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그때 힘든 시기를 사역을 위해서 또 신학교를 위해서 사도 바울처럼 기쁨으로 고난도 감내했다면 어땠을까? 도 오늘 말씀으로 비추어 생각해 본다.

나도 너무 부족하고 연약해서 기쁘게 감당하질 못했었다. 그래서 아팠던 것이고 병이 들었던 것이다. 누굴 탓할 일이 못 된다.

나도 그들에게 좋은 사모가 아니었다. 끝까지 설득할 사랑도 부족했고 내 일을 기쁘게 감당하지도 못했었다. 아무래도 나는 사역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일을 겪으면서 " 아! 하나님 손으로 넘어가는 일이구나... 내 선에서 해결되는 일은 아니구나!" 하는 마음은 들었다.

오늘 말씀 적용은 무척 어렵고 마음이 복잡해진다.

사도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 같은 관계가 도대체 존재할까? 하는 마음이 들고 만약 내가 끝까지 견딘다고 해서 즉 나가라!라고 하더라도 아니요! 하면서 더 버텨 내는 게 옳은 것일까? 잘 모르겠다.

무엇이 옳은지 더 고민을 해야 할까? 아니면 그마저도 덧없는 것인지... 그저 덮고 용서하는 게 옳은지도...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그 시기에 기쁨으로 감내하지 못한 것 사실이고 이것은 잘못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솔직히 그렇게 감내할 자신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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