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과 세 친구의 변론이 끝나고 새로운 인물 엘리후가 등장을 한다.
엘리후가 욥기서에서 하는 역할은 욥과 세 친구의 변론과 하나님의 답변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엘리후의 등장은 하나님의 대답 사이에 거리를 둠으로 욥과 말씀을 읽는 우리가 문제로부터 한 템포 쉬며 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
엘리후의 답변은 어떤 부분은 틀린 부분도 있고 어떤 부분은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부분이 있다.
그중에 나를 동의하게 만들고 공감하는 부분을 나누고 싶다.
36:15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에서 구원하시며 학대 당할 즈음에 그의 귀를 여시나니
36:16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대를 환난에서 이끌어 내사 좁지 않고 넉넉한 곳으로 옮기려 하셨은즉
무릇 그대의 상에는 기름진 것이 놓이리라
자신을 먼 곳에서 지식을 얻은 자 즉, 하나님으로부터 지식을 얻은 사람으로 소개하는 엘리후는
36장 후반에서 이어지는 37장까지 자연의 위대함으로 화제를 돌리며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답변으로 이어준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에서 구원하시며 학대 당할 즈음에 그의 귀를 기울여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 환난이 환난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이끌어 내셔서 넉넉한 곳으로 옮기시는 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천지를 주관하시는 분이 내 아버지 되시고 나의 환난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분명히 그 어려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걸 생각하고 그분을 신뢰해야 한다.
이것이 고난이 주는 유익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 한 번도 나에게 주신 고난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허락하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 당시는 잘 몰라서 욥처럼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나요!" 하고 질문을 던졌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유 없는 고난이란 없었다.
모든 고난이 죄로 인한 고난은 아니었지만 그 고난이 나에게 유익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그 고난 가운데 자신의 의가 무너지고 겸손하게 만들었고
그 고난으로 인해 고난 가운데 놓인 다른 사람을 이해해 주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엘리후는 불평만 하지 말고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자연의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어제 개기일식이 달라스에 있었다.
달이 완전히 해를 가리자 링을 만들고 코로나 현상을 보게 될 때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의 세계를 보고 감탄이 나왔다.
정말 경이롭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 순간 오로지 하나님만 생각하게 되었다.
아마도 엘리후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고난만 보지 말고 자연을 창조하신 그 위대하심을 바라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나님은 엘리후를 사용하셔서 욥에게 자신의 전지전능함을 바라보게 하고 문제라고 생각하는 곳에서 벗어나
자신을 찬양하고 그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 임을 상기시켜 주 시렸던 것 같았다.
위대한 하나님 앞에 자신은 죽고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면
하나님이 왜 욥에게 이런 고난을 주셨는지 ... 그저 듣는 자세가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다.
나도 힘이 들면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 욥기서에 나오는 말씀들을 읽고 묵상하곤 한다.
그러면 갑자기 평안이 찾아오고 하나님께 맡기자!라는 고백이 나온다.
누구나 고난은 당하고 산다.
그러나 그 고난을 고난으로만 보지 말고 고난 넘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그 고난을 통해 겸손해지고 다른 사람을 위로해 주는 자리에 선다면 그 고난은 축복이라는 생각이 드는 묵상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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