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이 죽고 남유다와 북 아스라엘로 나눠지는데 북이스라엘의 첫 왕의 이름이 여로보암이다.
오늘 말씀 묵상하며 문득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라는 생각을 했다.
모든 인간은 완전하지 않고 물론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이런 보편적인 한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겨진 사명이나 허락하신 한계를 말하는 것이다.
11:31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가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11:32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한 성읍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
다윗은 밧세바 사건 외에는 여호와의 법도를 온전히 지켰지만 솔로몬은 그렇지 않았다.
이방 여인들과 결혼을 통하여 점점 다른 신들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생각하서셔 솔로몬 대까지는 그 왕국을 나누지 않으셨지만
솔로몬의 아들 때부터는 두 나라로 나누셨다.
그러나 분명히 그 영역에 한계를 두셨다.
말씀처럼 여로보암에게는 열 지파를 주고 다윗의 혈통의 유다 지파로 나누셨다.
이렇게 명시하시는 건 여로보암이 자신에게 허락된 한계를 분명히 알려주시며 이미 열지파는 너의 나라이니
다윗의 것은 절대로 넘보지 말라라는 뜻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명제가 있는데 너도 다윗처럼 내 율례를 지키고 내 법도를 행하면 열지파는 너의 몫이니 지켜 주신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아들대까지 변함없이 너의 몫으로 이미 한계를 분명히 두신 것이다.
그리고 유다가 비록 하나님을 떠났을지라도 한 지파를 주신 것은 다윗과 함께 한 약속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이렇게 넘지 못할 한계를 분명히 두셨다.
열 개나 이미 가져도 여로보암은 백성들이 다윗 왕국으로 떠날까 두러워했다.
아마도 36절 말씀처럼 열지 파는 너에게 주지만 한 지파는 다윗의 아들에게 주어 예루살렘에서
내종 다윗의 항상 내 앞에 등불을 가지고 있게 하라는 말씀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진 것보다 나머지 한 가지에 두니 불안한 것이다.
여로보암이 그대로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를 받아들이고 다윗의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자신에게 맡겨주신 열 개에 마음을 두고 하나님 말씀처럼 정직하게 율법을 행하는 것에 집중했더라면
그의 인생이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런 경우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 같다.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과 탤런트보다 남의 것에 더 관심을 가지고 불평했던 순간들이 지나갔다.
내게 허락하신 사명이나 탤런트에 더 집중하기 보다 남의 것에 마음을 두고 부러워하는 경우가 지금도 있다.
분명히 하나님은 한계를 두셨다.
이 부분은 하나님의 주권인 것이다.
결국은 12장에서 보면 금송아지를 만들게 이른다.
12장 28절 시작 문장인 "이에 계획하고..."라는 문장이 참 슬프다.
하나님의 주권의 영역이고 나에게 허락한 분명한 선이 있다는 걸 알고 사는 게 지혜로운 것 같다.
이 한계를 잘 지키는 것이 내가 살고 남도 사는 길이다.
이 한계를 지키는 것이 순종이며 순종하면 그다음의 일은 하나님이 더 큰 것을 주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이 무엇이며 이것에 더 집중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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