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의 말씀 묵상

요엘서 1장에서 3장까지 묵상

차작가 2023. 10. 1. 13:02

요엘은 여호와(야훼)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의 이름이다.

그래서인자 요엘서에는 "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라는 말씀이 자주 등장한다.

요엘서는 다른 소선지서들과 다르게 그가 활동했던 시대에 왕들의 이름이나 연대를 알 수 있는 아무런 기록도 없어서 기록 시기를 알 수 없다.

요엘서가 호세아와 아모스 사이에 끼여 있으므로 대략 그들과 비슷한 시기로 간주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요엘서의 주요한 특징은 첫째, 여호와의 날 강조. 두 번째는 여호와의 날 묘사. 세 번째 사도들에게 중요한 예언서.

네 번째 회개의 중요성을 꼽을 수 있다.

여호와의 날 즉 종말에 이른 심판의 날은 책 전체를 하나로 묶어 주는 중요한 주제이다.

요엘서 2장에서 등장하는 메뚜기 떼는 군대로 표현한 것인지 실제 메뚜기인지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것을 진두지휘하시는 분이 여호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어느 누구도 이길 수 없다.

1장에서는 메뚜기 재앙을 사용하여 여호와의 날을 묘사하고 있다.

한 종류의 메뚜기 떼만 덮쳐도 남아 나는 것이 없는데 내 종류의 메뚜기 떼가 계속 덮쳐서 그나마 남아 있는 것을 먹어 치운다면

고대 근동 사회뿐만 아니라 그 일대 모든 지역의 농작물에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심판의 날을 메뚜기 재앙으로 표현하는 것은 아주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고대 근동에서는 이러한 재앙을 신의 노여움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성들은 요일의 메시지에 집중했을 것이다.

그리고 요엘서는 사도 베드로와 바울에게 중요한 예언서이다.

신약의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날 교회가 태동하던 때에 베드로가 전한 메시지에서 인용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요엘서이다.

다락방에 모여 있던 무리들에게 성령이 강림해서 그들이 각기 여러 나라의 방언을 말하자

당시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모였던 사람들이 어찌 된 일인지를 믇기 시작한다.

이때 베드로가 요엘서 말씀을 인용해서 오순절 사건이 요엘 예언의 성취임을 말씀으로 성취했다.

요엘 2장 28절에서 32절과 같다.

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2: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2: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사도바울도 로마서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도 요엘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선포한 것이다.

그리고 요엘서는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요엘서 2장 12절

2: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이 말씀은 요엘서의 터닝 포인트가 된다.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메뚜기 떼의 피해를 보상해 주시겠다고 말씀해 주신다.

즉, 회복과 구원을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회복은 그분이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기 때문이라고 2장 13절에서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을 알려 주는 것이다.

이스라엘에 임한 메뚜기 재앙을 통해 고통 속에서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게 하시는 하나님을 1장을 통해 깨닫게 하신다.

그런 재앙을 통해 2장에서는 2장 13절

2: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회개하고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라고 말씀하신다.

그럴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긍휼이 여겨 회복을 약속하신다.

2장 19절

2:19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리니 너희가 이로 말미암아 흡족하리라 내가 다시는 너희가 나라들 가운데에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이며

회개할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 주신다.

2장 28절에서 29절

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그동안 자신을 위해 살아왔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이 임하자 하나님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삼게 된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이다.

오늘은 3장을 나누고 싶다.

1,2장에서 재앙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영이 부어지고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을

자신의 꿈으로 삼는 것은 그 영혼을 살리는 생명력을 갖게 된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그들을 괴롭혀 왔던 자들을 심판하신다.

3장 1절에 "보라"라고 시작한다.

여기서 "보라"는 하나님의 압도적인 창조 구원 사역을 설명할 때 사용된다.

3:1 보라 그 날 곧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가운데에서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할 그 때에

그들의 죄를 심판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던 메뚜기떼 그것이 실제적인 메뚜기인지 다른 나라의 침략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그 고난 가운데 있었던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하신다.

그리고 2장에서 "여호사밧 골짜기"로 내려가셔라는 표현이 있다.

여호사밧은 "주께서 심판하신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여호사밧은 남 유다 왕의 여호사밧의 이름과 같다.

남 유다의 여호사밧의 왕때는 평화롭고 나라가 번영한 시기였다.

여호사밧의 큰 실책이 있다면 북 이스라엘의 아합왕 때 아합의 딸 아달랴와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과의 혼인이었다.

사돈 지간이었던 그들은 본래 길르앗 라못이 북 이스라엘 땅임을 이야기하며 함께 손을 잡아 그 땅을 되찾아 오고자 한다.

여호사밧은 이 일을 좋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야합 왕에게 선지자에게 불러보고 결정하자고 말한다.

야합 왕은 선지자 400명을 모아서 그들에게 물었다.

모두 찬성하자 여호사밧이 내심 내키기 않아서 다른 선지자가 없냐고 묻는다.

그때 미가야라는 선지자가 있지만 그는 늘 좋은 말을 하지 않는다고 여호사밧에게 말한다.

야합은 북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독한 왕이었으므로 미가야가 좋은 말을 할 리가 없었다.

미가는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라고 말한다.

이 인물과 이곳에 나오는 "여호사밧의 골짜기"란 명칭은 다르지만

여호사밧의 이름의 뜻은" 주께서 심판하신다"라는 의미를 가지므로 여호사밧 골짜기는 "심판의 골짜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3:2 내가 만국을 모아 데리고 여호사밧 골짜기에 내려가서 내 백성 곧 내 기업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거기에서 그들을 심문하리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을 나라들 가운데에 흩어 버리고 나의 땅을 나누었음이며

심판의 골짜기에 하나님이 내려가셔서 자신의 백성들을 위하여 심문하지만

끝까지 하나님의 돌보심은 시련 속에서도 계속됨을 설명하고 있다.

3절에서 보면

3:3 또 제비 뽑아 내 백성을 끌어 가서 소년을 기생과 바꾸며 소녀를 술과 바꾸어 마셨음이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수단으로 삼는 행위를 싫어하심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이든지 목적으로만 대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여길 때는 반드시 심판하신다.

즉, 행한 대로 대갚음해 주신다는 의미이다.

미가서 4장 3절에 보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라는 말씀이 있다.

즉, 더 이상 전쟁이 없는 시기가 오고 전쟁에 사용되던 무기를 농사 도구로 바꾸는 평화로운 세상을 뜻한다.

그런데 4절에 보면 사람을 수단으로 사용할 때 하나님이 보복하시는 것을 신속히 하신다고 표현하고 있다.

3:10 너희는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지어다 낫을 쳐서 창을 만들지어다 약한 자도 이르기를 나는 강하다 할지어다

하나님이 만드신 생명을 존중히 여기지 않고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이럴 때아닌 것에 있어서는 의로운 분노를 가지길 원하신다.

10절에 나오는 말씀은 미가서에 나오는 말에 반대되는 말씀이다.

농사 기구로 사용했던 보습을 다시 쳐서 칼로 만들고 농기구였던 낫을 다시 창으로 만들라고 하신다.

바로 평화를 위해서는 불의에 대항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낫의 의미는 심판의 상징이다.

하나님은 직접 불의 한 것의 심판할 수 있으시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구원하시길 원하신다.

즉 하나님의 나라에 우리가 동참하길 원하시는 것이다.

옳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저항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대항을 넘어서 평화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럴 때 하나님은 18절과 같은 결과를 얻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3:18 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성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

믿는 우리가 의로운 분노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즉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것에 동참할 때

비로소 성전에서 샘이 흘러나와 싯딤 골짜기에까지 물을 대게 된다.

즉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할 때 이웃까지 복되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그럴 때에 진정한 평화가 임하는 것이다.

3:21 내가 전에는 그들의 피 흘림 당한 것을 갚아 주지 아니하였거니와 이제는 갚아 주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에 거하심이니라

여기서 갚아 주지라는 의미는 "정결하게"라는 뜻이다.

우리의 동참함이 정결하지 않았던 곳이 이제는 정결하게 되어 여호와께서 시온에 거하심과 같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주할 때 이웃에게 복을 나누어 주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주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해야 하며

그럴 때에 불의한 것을 바라보는 마음이 열리고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그러한 삶이 하나님에게 보호받을 수 있고 또한 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