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묵상

아담에 의한 죽음이 그리스도에 의한 생명으로 - 로마서 5장 12~21절

차작가 2023. 12. 24. 12:09

성경:

12절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절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니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절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ㅣ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15절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절 또 이 선물은 범죄 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절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절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이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절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 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절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해석:

1. ‘사망이 왕 노릇 한다’는 뜻은? (14절)

모든 사람은 죄의 종으로 살아간다는 것. 어느 누구도 사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아직 우리는 죄의 세력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증거는 우리 역시 죽는다는 것이다.

2.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는 뜻은? (15절)

오직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다고 말한다. 예수님 한 분이 잘하셔서 그 선물이 오늘 우리들에게 넘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감사하고 누리면 된다.

3. 복음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15, 17, 18절)

한 사람으로 인해서 죄가 들어오고 사망이 들어온 세상에 한 사람의 의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은혜가 넘치고(15) 생명안에서 왕 노릇 할 것(17)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사망을 이기는 것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행동이다. 그 행동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에게 은혜가 넘치게 되고 의롭다 하심을 받고 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18절)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4.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는 무슨 뜻인가? (20절)

보통법이라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이것이 법에 대한 일반 상식이다. 그런데 20절에서는 율법이 주어진 것은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범죄를 더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하고 있다. 즉 죄를 조장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율법이다는 뜻이 된다. 이 말이 이해가 어렵다.

그렇다면 율법이 범죄를 더하게 한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 이것은 결국 '하라' '하지 말라'라는 법을 통해서 인간의 내면에 숨어져 있는 죄의 모습을 끌어낸다는 뜻의 말씀이다.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는 죽는 이유를 몰랐는데, 율법이 주어짐으로 해서 죄 때문에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율법을 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자.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인간의 자랑거리가 사라진다. 바리새인들이 자랑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자기들은 율법을 받은 자이고 율법을 지키는 자라는 것이었다. 율법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구원받을 존재라는 것을 자랑했다. 그런 그들에게 만약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그들은 무엇을 자랑했을까? 율법이 없다면 제사하고 구제하고 십일조 한다고 해도 그것을 자랑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하라고 말씀하지도 않은 것을 하면서 '나는 이것을 했다'라는 자랑을 할 수 있을까?

오늘날 교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금의 교회가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의 대표적인 것은 주일 잘 지키는 것, 십일조 하는 것, 봉사 잘하는 것 등이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의 법으로서 신자들에게 제시한다. 일단 하나님의 법으로 제시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시키는 것이고 그것을 실천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다는 것이 법의 공식이다. 실천하면 그만한 대가를 준다는 것은 세상 상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자들은 하나님이 법이라고 말씀하는 것을 실천하면서 그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게 된다. 실천했으니까 뭔가 달라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들이 율법이 없을 때 드러날까? 안식일 지키라는 법이 없는데 주일을 지키면서 그것을 신앙이라고 말하고 복을 받는 방법이라고 말할까? 하나님이 요구하지 않은 것은 실천할 필요도 없고 실천한다고 해도 자기 자신에게 복으로 다가오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실천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아예 처음부터 실천해야 할 이유도 없고 실천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무엇이 드러나지 않을까? 자기중심으로 살고 자기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죄가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천국보다는 상을 기대하고 살아가는 죄가 드러나지 않게 된다. 그럴 때 인간은 자기의 죄를 모르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을 주심으로서 인간의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죄를 끄집어 내시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의 인간의 죄를 드러내시는 것일까? 그 이유도 역시 20절을 보면 명확하게 나와 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는 자신의 죄를 깨달은 사람에게 넘친다는 뜻이다. 결국 자신의 죄를 모르는 사람들이 말하는 은혜는 진정한 은혜가 아니라는 뜻이 된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은혜는 '나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다'는 것을 아는 그 자리에서 넘치게 되어 있다. 자신에게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은혜가 아니라 일한 대로 받는 삯이다. 많은 사람들이 상급을 말하지만 상급이라는 것도 역시 일한 대로 받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다. 내가 한 것만큼 받아 챙기겠다는 것이다. 은혜를 무시하고 행한 대로 대해달라고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 그렇다면 그 결과가 무엇일까? 행한 대로 보응하실 때 결과는 사망일 수밖에 없다.

'나는 은혜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필히 자신의 죄를 알아야 한다. 한자기 죄를 알고 자기 의에 대해서 완전히 포기할 때 십자가의 피가 우리의 죄를 가리우고 우리를 의로 여기시고 천국 가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슴에 넘치게 되는 것아다. 이것을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것이다.

분명히 율법은 실천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죄를 더하게 하셔서 자신의 의에 대해서 포기하게 하시고 은혜가 넘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율법을 들이대고 실천을 요구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다 아니할 수 없다.

구원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우리의 죄를 극복하고 주어진다. 자기 죄를 극복하고 주어지는 구원은 생각하지도 않고 단지 2천 년 전에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말만 하면 주어지는 구원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자기의 죄와 상관없이 단지 예수 믿는다는 말만 하면 주어지는 구원으로 인식되어 버린다. 이것을 위해서 율법을 주시는 것이다. 율법으로 자신의 뿌리 깊은 죄를 알게 하고, 상대적으로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깊고 넓은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인 것이다.

5.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말의 뜻은? (20절)

그 말은 죄를 많이 지으면 그만큼 은혜가 많이 부어지니까 죄를 더 많이 지으라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고 인식하는 곳에만 은혜가 은혜로 드러나게 된다는 그런 말씀이다.

적용:

예수님의 의의 행동이 우리에게 은혜의 선물을 넘치게 하였으니만큼 우리는 자기의 행동을 보지 말고, 자기의 행동에 의의 의미를 두지도 말고 오직 예수님 한 분의 의의 행동 때문에 은혜가 넘치게 되었음을 감사하고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곧 신자의 본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은혜가 넘친 자에게는 은혜가 왕 노릇 한다. 사망이 왕 노릇 한다는 것은 사망 아래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은혜가 왕 노릇 한다는 것은 은혜가 나를 붙들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은혜가 나를 붙들어서 영생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신자는 은혜가 왕 노릇 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이젠 더 이상 구원을 위해서 보태야 할 우리의 노력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런 말을 하면 '그러면 은혜로 구원을 얻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란 말이냐?'라는 반문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아직까지 행위를 자기를 위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하게 되는 말이다.

그러나 자기를 위한 행위가 아니라 주님을 위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무엇을 하든지 주를 위해서 하게 된다. 이것이 은혜가 왕 노릇 하는 신자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