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묵상

의의 종 - 로마서 6장 15~23절

차작가 2023. 12. 24. 12:24

15절 그런즉 어찌하리오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오 그럴 수 없느니라

16절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여

17절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절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9절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20절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라

21절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22절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23절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해석:

1. 순종의 종의 의미는? (16절)

하나님과 복음에 대한 순종을 의미한다.

죄의 종이나 의의 종이라는 말을 죄를 행하고 의를 행한다는 행위의 차원에서 이해하면 안 된다.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죄의 종된 상태이며, 의의 종이란 자기가 바로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죄인임을 진심으로 깨달은 자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음을 깨닫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 의만을 증거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곧 의의 종이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17절에서 말하기를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도 역시 인간 편에서 보면 우리가 힘써 하나님이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의의 종이 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식의 해석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 스스로 순종해서 의의 종이 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가 왜 필요할까? 그러나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고 할 때,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여 의에 이르게 되었다면 그것도 역시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을 우리에게 허락하셨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감사할 것 밖에 없다.

2.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다는 의미는? (20절)

의에 대해서 자유했다는 것은 인간에게서는 의가 나올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의가 나올 수 없고 의를 행할 수 없는 인간이 무슨 의미 있는 열매를 맺을 수 있겠는가?

의에 대해서 자유 하였다는 것은 의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이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의 종이기 때문에 의를 생각하거나 자신을 의에게 종으로 드려야 한다는 생각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죄의 종으로 살던 우리들의 실체이다. 그런 우리에게 의에게 종으로 드려라고 말씀하는 것은, 결국 죄의 종에서 벗어나게 해서 의의 종으로 살게 하시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14절에서 말한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라는 말씀의 뜻이다.

5:20절에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말씀하는데, 이 말씀도 인간의 연약함을 깨닫고 죄의 종으로서 자신을 불법에 드리는 삶에 열심이었던 인간의 실체를 발견한 그곳에 우리의 연약을 짊어지시고 우리를 의의 종 되게 하신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뜻이다.

인간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죄에 대해서는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믿음의 근본이 사랑이고 그 사랑의 본질은 자기 부정과 희생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동안 믿음 좋다고, 그리스도를 안다고 했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랑한다고 해봐야 고작 내 마음에 들고 뜻이 맞는 인간을 사랑했을 뿐이지 자기를 부정하고 희생한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발끝도 못 미치는 자신에 대해서 발견할 수밖에 없다. 내 믿음도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알고 나니 이만하면 되었다는 것이 있을 수 없음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이 있을 때 자기 사랑이나 자기 의나 자기 믿음을 포기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에만 매달리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는 모습이다.

적용:

은혜 아래 있는 의의 종으로 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의의 종이란 자기가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죄인임을 알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음을 깨닫는 사람이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 의만을 증거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곧 의의 종이다.

우리 자신이 낮아짐으로써 그리스도의 의가 높아질 수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어떤 낮아지는 자리를 준비하셨다고 하더라도 순종해지는 자가 바로 의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오래전에 남편이 목회를 할 때 이 지역 노회에서 연합으로 한국에 있는 유명한 목사를 초대해서 부흥회를 한 적이 있었다. 얼마 전에 뉴스에도 시끄러웠던 목사였다. 그 당시 연합 부흥회의 일정은 평일은 연합으로 부흥회를 하고 주일은 각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방법이었다. 부흥 목사였던 그분은 아무 교회나 참석하는 것이었는데 감사하게도 연합부흥회 운영위원회 교회 중 가장 규모가 작았던 우리 교회에서 설교를 해 주신다고 하셔서 마음속으로 " 큰 교회 목사님인데 겸손하시구나... 참 고맙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 부흥회가 끝나고 그 목사님도 돌아가셨고 남편과 함께 부흥회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던 도중 나는 아주 실망스러운 이야기를 남편을 통해 들었다.

첫 번째 목사님이 머무시던 호텔에 주일 예배를 위해 남편이 모시러 갔었는데 그 부흥 목사님은 뒷좌석에 앉으시더니 마치 남편을 비서처럼 대하는 태도에서 실망을 느꼈다고 했다. 비록 나이는 남편이 어렸지만 교회의 크기와 상관없이 둘 다 한 교회를 담당하는 담임 목사 입장인데 남편의 작은 교회 목사라 비서와 같은 입장이 되어야 했고 그분은 큰 교회 목사님 회장 같은 자리에 앉은 태도를 보였다. 들었다.

두 번째는 그 당시 너무 힘들게 하던 장로님에 대해 목회 후배로서 고민을 나누니 "옥상에 데려가서 아무도 없을 때 한대 패버려라"라는 조언을 하셨다고 했다. 우스갯소리였는지 모르지만 설교하시는 그분의 특성이나 캐릭터를 봐서는 우스갯소리로만 들리지는 않았다.

우리는 죄의 종이었으나 의의 종이 된 자이다.

죄인 된 우리를 위해 한없이 낮아지신 예수님을 안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답이 나온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대단한 사람으로 보고 칭찬을 할지라도 그것에 속아서는 안된다.

우리는 본래 죄의 종이었던 죄인이라는 것을... 주님의 사랑의 크기와 넓이를 안다면 우리는 겸손히 낮아져야 한다.

의의 종은 항상 주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