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침 41:회개 시키시고 자녀 삼아 주시는 하나님 - 누가복음 15장 11-32절

차작가 2023. 11. 12. 11:39

오늘 본문의 위치:

오늘 본문은 누가 복음 15장 전체의 결론 부분이다. 누가 복음 15장은 하나의 주제로, 한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누가복음의 핵심장이라고 볼 수 있다. 성경주석가인 예레미야스가 누가복음 15장을 누가복음의 심장이라고 이야기할 만큼, 이 비유를 담고 있는 누가복음 15장은 복음의 핵심 내용을 풍성하게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장이다.

이 비유 앞에 두 비유가 더 있다. 그 첫 번째가 잃은 양의 비유이고, 두 번째가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이다.

잃은 양의 비유는 100마리의 양 중에서 한 마리를 잃어버린 목자가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를 버려두고 한 마리를 찾으러 갔다가 찾아와서는 잔치를 베푼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두 번째 비유는 열 드라크마를 갖고 있는 아낙네가 한 드라크마(드라크마는 그리스의 은화($45)이다. 한 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 로마의 한 데나리온과 동일한 가치의 화폐다)를 잃어버리고는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그 한 드라크마를 찾고는 기뻐한다는 내용이다.

첫 번째 비유에서는 양이 100마리이다. 그중 한 마리를 잃었다가 찾는 내용이다. 두 번째 비유에서는 드라크마가 열 개이다. 그중 하나를 잃었다가 찾는다. 그런데 세 번째 비유에서는 두 아들 중 하나를 잃었다가 다시 찾는 내용이다. 예수님은 지금 점층적인 수사기법을 동원하여, 양 100마리 중 하나를 잃었다가 다시 찾아도, 신부에게 귀중한 혼수품인 열 드라크마 중 하나를 잃었다가 다시 찾아도 그렇게 기쁜데 두 아들 중 하나를 잃었다 찾았을 때 그 아비의 기쁨이 얼마나 크겠는가를 점층적으로 설명하고 계신 것이다.

10절에서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인간의 구원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깊은 관심과 애정을 설명하고 계신다.

 

이 비유의 주인공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 임을 알아야 하고 이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비유 설명:

1. 11절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다고 말씀하심으로 시작한다.

2. 12절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라고 말한다.

1) 당시 유대 풍습

유대 사회에는 부모가 자식에게 유산을 물려줄 때 큰 아들이 항상 동생들의 두 배를 받았었고, 동생들이 나머지를 갖고 나누는 식으로 유산 분배를 했다. 그것은 신명기 21:17 말씀에 근거 한 것이다.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그러나 부모의 유산은 항상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자식들에게 분배가 되었고, 혹 부모가 살아계셨을 때 유산 분배가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부모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그 재산의 소유권과 처분권과 관할권이 여전히 부모에게 있었다. 자식들은 부모가 돌아가셔야 비로소 그 재산의 처분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2) 이렇게 볼 때 둘째 아들이 유산을 달라는 것은 아버지가 빨리 죽으라는 것과 다름 없는 것이다.

당시에는 아버지가 살아계심에도 아버지의 유산의 처분권을 행사하려 했던 자들을 살인자와 방불한 죄인으로 취급을 했다. 그건 곧 아버지가 빨리 죽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밖의 나올 수 없는 그런 패역한 행위이다. 그래서 그러한 자식은 아버지를 죽인 자식 취급을 받아도 무방한 그런 시대였다.

3. 줄거리:

이런 패륜아 에게 아버지는 어떻게 했나? 12절에서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준다’. 아들의 황당한 요구에 거절도 안 하고 나눠주었다. 그런데 왜 아버지가 이것을 허락하는지는 다음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13절에 보면,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로 간다’.

그리고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게 된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그 지역에 흉년이 들어서 어떤 사람에게 붙여서 살게 되고 그 사람이 돼지를 치게 했다. 유대인에게 돼지를 치게 한다는 것은 치욕 중에 치욕이다. 그리고 먹을 것이 없어서 돼지나 먹는 쥐엄 열매(쥐엄나무는 이스라엘에서 흔히 자생하는 나무다. 옛날에는 가난한 이들의 양식이 되었고, 그 열매의 꼬투리는 가축의 사료가 되었다. 콩 꼬투리가 납작하며 그 속에는 7∙8개의 씨가 단맛이 나는 과육으로 둘러싸여 있다)를 먹기까지 한다. 17절에서 이럴 때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라고 고백한다. 여기서 ‘스스로 돌이켜’라는 뜻은 히브리어와 아람어에서 회개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쓰였던 어구이다. 돼지우리 속에서 돼지가 된 자신의 모습을 올바로 인식하고 자각하게 된 둘째 아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바로 깨달음이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7,18절에서 알 수 있다.

 

4. 둘째 아들을 회개 할 수 있도록 만드시는 하나님

이런 회개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아버지가 재산 요구에 대한 아들의 요구를 들어 주었던 것으로 부터 시작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재산을 주면 그것을 가지고 가서 모두 허비해 버릴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재산을 주어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버려두었다는 것이 곧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아예 재산을 주지 않았던지 집 나가는 애를 붙잡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배우게 하기 위해 제멋대로 하도록 버려두셨다.

집을 나가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비참한 생활을 하게 함으로써 아버지의 집에서는 품꾼으로 지낸다고 해도 그것이 행복임을 깨닫게 하고자 하신 것이다. 또한 비참한 처지가 되어서 돌아오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어떤 분인가도 몰랐을 것이다.

◉ 잃음으로 얻음 ◉ (집을 나간 경험)

둘째 아들은 집을 나가 모든 것을 잃어버림으로 자신이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음을 알게 된다. 단지 아버지의 재산을 잃어버린 것을 죄로 여겼다기 보다는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의 품에 있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고 행복인가를 모르고 내 마음대로 살아보고자 한 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배우게 되었다.

하나님은 가끔씩 하나님의 뜻은 아니지만 그냥 우리가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두실 때가 있다. 그러면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깨닫게 된다. 강요하지 않으시고 은혜 가운데 깨닫게 하신다.

하나님은 반드시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아버지의 집을 바라보게 하고 돌아오게 하신다. 때로는 비참한 처지가 되게 하시면서 아버지가 함께 하는 아버지의 집에 소망을 두게 하시고 돌아오게 하신다.

그래서,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내 자신 스스로 회개 하는 게 아니다. 진정한 회개란,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의 행복과 만족을 추구하며 사는 삶이 돼지우리 속의 돼지 같은 삶이며, 자신들이 추구하는 모든 세상의 힘들은 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는 것을 올바로 자각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19절에서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렇게 회개하고 돌아오는 아들을 아버지는 아주 먼 곳에서부터 오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달려 나가셨다.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리다가 발견하신 것이 아니라 아들이 나간 그 순간부터 아들의 삶에서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으셨다. 한순간도 우리를 놓치지 않으시고 매 순간 우리와 동행을 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다.

아버지는 패륜아로 낙인찍힌 자식이 동네에 들어서자 자식이 당할 수모를 직감하셨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이 비난하기 전에 먼저 아들에게 화려한 옷과 신발과 반지를 끼워 버리셨다. 용서되지 못한 아들을 아버지가 먼저 용서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율법에 위배되는 행위였다. 아버지는 스스로 율법을 파기해 버리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십자가이다. 아버지 스스로가 율법을 허무시고 아들을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 버리시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율법을 어기신 대가로 사형 언도를 받으신다. 그렇게 해서 아들이 살아날 수 있었다. 그게 복음이며 그게 구원이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지난날에 대해서 책망하지 않으셨다. 돌아왔다는 것으로만 기뻐하셨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어떤 분이라는 것을 그때 비로소 알았을 것이다. 이런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하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온 몸으로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푼 것을 알게 된 큰 아들이 분노하며 잔치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나와서 잔치에 가서 함께 즐기자고 권하자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I’ve been slaving for you)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29,30절)라고 대답한다.

큰 아들은 아버지를 떠난 적이 없었다. 아버지를 섬기며 명을 어긴 적도 없이 열심히 (노예처럼) 일을 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런 자신을 위해 잔치를 베푼 적이 없었으면서도 아버지의 재산을 날려버린 아들을 위해서는 잔치를 베푼다는 것이 불만이다.

친구들과 즐기고 싶다면 자신이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하면 된다. 그런데 아버지가 주지 않아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면 큰 아들은 아버지의 명을 어기면 안 되고 명이 없이는 아무것도 하면 안 되며 오직 시킨 것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이 아버지에 대한 큰 아들의 오해이다.

아버지에 대해서 오해한 큰 아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을 큰 아들처럼 생각했다. 하나님을 항상 자신들이 율법과 규례를 잘 지키는지 감시하고 벌을 주는 존재로만 여겼다. 따라서 이들은 비록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과의 함께 하심 역시 기쁨이 되지 못했다.

바리새인들의 눈에 예수님이 세리, 죄인들과 함께 하는 것이 못마땅하게 보인 것도 그들은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고 따라서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믿는다고 하는 아버지가 회개하고 돌아온 자들을 기뻐하시는 분이었음을 알지 못했다. 하나님께 대접 받아야 할 사람은 평생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명을 따라 사느라고 수고한 자신들이라고만 생각했다.

큰 아들은 아버지와 항상 함께 하고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것이 다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송아지 한 마리에 불만을 토로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마음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자기 입장만 생각했다.

평생 아버지를 섬기고 아버지의 명을 따랐다는 것이 자랑거리가 아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기쁨이 아니다. 큰 아들은 집을 나가본 적이 없고 평생 아버지만을 섬겼다. 아버지와 함께 하긴 하지만 아버지와 함께 하는 것이 큰 복이며 기쁨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것이 아버지께 죄가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결론:

종은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그래서 아버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전혀 모른다. 겉으로 드러난 도덕적 윤리적 선한 행위가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지 못했음을 꼭 기억해야 한다. 그렇게 착하게 살던 큰 아들이 결국 마을 사람들과 가족들 앞에서 아버지를 심하게 모독을 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둘째가 아버지 재산을 가지고 나가 전부 탕진을 한 일이나, 큰 아들이 사람들 앞에서 잔치를 베푼 아버지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모욕하며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는 것은 하늘의 관점에서 동일한 죄이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 진심으로 아버지의 소중함을 자각하여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그런 자녀들을 기다리고 계신다.

아버지의 기쁨은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오는 거다. 지금도 아버지는 길에 나가서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신다. 이것은 집을 나간 아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아버지가 함께 하시는 기쁨과 복 됨을 알지 못하고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만 생각했던 자신이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음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아버지의 집이 그리워 그 마음이 아버지께로 향하게 되는 그가 아버지께 기쁨이 되는 아들이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아버지가 내게 함께 하신다는 것이 늘 희망이 된다.

이 비유의 마지막 절을 보면 하나님의 구원이 어떤 것인가가 아주 선명하게 기록이 되어 있다.

(누가복음 15:32)

32절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아버지는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둘째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난 자라고 말씀을 하신다.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아버지를 떠나 자신의 쾌락과 행복만을 위해 살았던 둘째는 율법에 의해 죽어 마땅한 자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그 자식이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고 선언하셨다. 우리는 모두 둘째 아들처럼 죽어 마땅한 사람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다시 살리셨다. 바로 아버지가 지신 십자가 안에서이다.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 잘못된 길을 가던 우리들이었지만 한 순간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결국에는 회개 시키시고 자녀 삼아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