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절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5절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6절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절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8절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9절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절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 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절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오
15절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오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해석:
1. 예수 그리스도가 의를 이루기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4절)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예수님이 오심으로 율법은 마침이 되었으니까 이제 예수님을 믿는 이상 율법은 필요가 없다'라는 오해를 한다. 즉 율법의 자리에서 아예 율법을 송두리째 뽑아 내 버린다. 그리고 그리스도만 남겨 놓으면 그것이 곧 복음인 줄로 착각을 한다.
율법을 뽑아 버려야 비로소 복음이 되는 줄로 착각을 한다.
그러나 율법을 뽑아냄으로써 복음만 남는 것은 아니다. 율법을 없애는 것이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오셨으니까 이제 율법은 뽑아서 없애버려라는 의미의 말씀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4절의 말씀은 '율법의 목표는 그리스도이니 이는 믿는 자 모두에게 의가 되기 위함이다'라는 뜻이다. 즉 율법이 추구하는 것은 행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라는 의미이다. 때문에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율법이 추구하고 목표하는 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이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율법이 그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이제 그 역할이 끝난 이상 사라져야 한다는 것은 율법의 의미를 모르는 잘못된 생각이다.
율법의 목표는 하나님의 의에 있다. 따라서 율법으로부터 의가 온다고 생각하고 무작정 율법 안의 의를 좇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곧 그리스도의 의로 이루어진 나라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순종하면 되지 율법에 순종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특히 복음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 사이에 이런 분위기가 많이 형성된 것 같다. 율법을 통해서 인간의 죄악됨과 불의함을 깨닫고 율법을 통해서는 의가 나올 수 없음을 깊이 자각하고 그 의에 복종하게 하는 것이 율법의 목표이고 율법이 추구하는 것이다.
2. 그(예수님)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의 뜻은? (11절)
주님 앞에서는 그런 것으로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주님은 세상 것으로 우리를 판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행위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주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신다는 말씀의 의미이다.
주님의 의는 하나님에게 기쁨이고 영광이기 때문에 그 의를 내세우고 하나님께 나가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우리가 가져야 할 부끄러움은 우리의 의를 기억한다는 것이다.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인데 우리는 내가 한 것을 내 가슴속에 차곡차곡 묻어둔다.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내 자존심을 세우고 자신을 자랑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하나씩 꺼내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데 사용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들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주님의 의가 나를 의롭게 하고 천국 가게 하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내 의를 포기하지 못하고 가슴에 묻어두고 나를 자랑하고 내세우는 어리석음에 대해서 거룩하신 주님의 십자가의의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이것이 진심으로 예수님을 만난 신자이다.
3.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의미는? (13절)
우리가 기도하면서 '주여'라고 부른다고 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아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나는 쓸모없는 인간입니다'라는 고백이다.
과연 이것이 자존심이 있는 인간에게 가능한 일일까? 사람은 비록 말은 '나는 쓸모없다'라고 해도 그 마음 한구석에는 그래도 남보다 나은 것이 있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 하다못해 돈 한 푼 없는 가난뱅이라고 해도 자기 자존심을 세우려고 한다. 가령 돈 많은 사람들이 사치하며 사는 것을 볼 때 그들을 욕한다. '나 같으면 돈을 저렇게 쓰지 않겠다'라고 하면서 자신에게 의를 둔다. '나도 돈이 있으면 저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라는 고백을 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전적 자기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고, 자기 포기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선물이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자연히 구원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선물이다. 바울은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14-15절의 말씀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4.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오’의 뜻은? (15절)
이 말씀은 전파를 하되 전파하도록 보내신 분이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들 스스로 전파한 것이 아니라 보내신 분이 따로 존재하신다. 그분이 보내심으로 전파하게 되었고, 전파함으로써 듣는 자가 있게 되고, 들음으로써 믿게 되고 믿음으로서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이 하셨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것은 주님을 믿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런데 주님에 대해서 들은 적도 없이 어떻게 주님을 믿을 수가 있을까? 나에게 주님을 말한 그는 내가 원해서 부른 것일까? 바울은 주님이 보내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지금 우리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면 그 모든 것은 주님이 나를 전도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도는 주님이 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다면 그는 단지 보내심을 받은 자인 것이다.
적용:
우리는 믿음을 위해서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다만 우리에게 찾아오신 분을 믿게 된 것뿐이다. 때문에 믿음을 내세워서 자신을 자랑할 수 없다. 만약 누구든지 자기 믿음을 자랑한다면 그는 자기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갔고 자기 스스로 말씀을 붙들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하나님이 작정하신 자에게는 믿음을 줘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실 수가 있다. 우리 쪽에서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를 선정할 수 없다.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자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참으로 못난 자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리스도의 피를 우습게 여기며 살았었다. 은혜와 사랑이 날 살렸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내 것을 내세우고 자랑하는 우리들의 삶이 부끄러울 뿐이다.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려고 체면치레하고, 자신을 가리고, 열심을 내려고 했던 우리들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럽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진심으로 부끄러워할 때 모든 사람에 대해서 부요한 자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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