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 묵상

손바닥 묵상 1 - 데살로니가전서 묵상

차작가 2024. 1. 16. 11:45

바울이 아시아에서 말씀 전하기를 계획했지만 성령님이 허락지 않으셨다.

환상에 마케도니아 사람이 바울에게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는 환상을 보고

바울은 빌립보에 이르러 첫 성 마케도니아에서 자색 옷감 장수 루디아를 만나 그곳에서 교회를 세웠다.

그곳에서 유대인 중 많은 귀부인과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니 위기의식을 느끼고 장터에 불량배들을 모아 바울을 죽이려고 하자

바울은 데살로니가로 이동하여 복음을 전하는데 그곳에서 세워진 교회가 데살로니가 교회이다.

그러나 빌립보에서 쫓아온 깡패들이 다시 바울을 죽이려고 하자 바울은 베뢰아로 이동을 하게 된다.

이런 배경 가운데 세워진 교회가 데살로니가 교회이다

2:11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2:12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유대인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많은 핍박이 따랐다.

그들의 상권 협동조합 길드에서도 퇴출을 받아야 했기에 생활에도 어려움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렸을 것이다.

삶이 궁핍하고 어려울 때 예수님이 오시길 간절히 고대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1장 3절과 같은 말씀을 한 것으로 보인다.

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1: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1: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1:7 그러므로 너희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고난은 믿음의 진가를 보여주는 통로인 것 같다.

고난이 있어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 말씀을 받을 때의 자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권면은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모두 어려운 숙제인 것 같다.

그러나 그 권면이 하나님이 하시는 거라고 인식한다면 감사하기가 쉬울 것 같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니 아버지가 나에게 사랑으로 권면을 하면 징계도 감사고 하나님 말씀을 듣는 자세가 달라진다.

또 권면하는 자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에게 하듯 하는 자세가 필요함을 느낀다.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의 피로 사신 자녀임을 명심한다면 함부로 권면하는 게 얼마나 큰 죄인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말씀 선포가 이루어지는 강대상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

곧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사랑하신 자녀에게 권면의 말씀을 하는 마음으로 한다면

듣는 성도들도 그 사랑을 알고 말씀을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또 성도도 선포되는 말씀이 사랑하는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기를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자녀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마음으로 알고 듣는다면 그 권면의 말씀이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씀이라도 그것은 사랑이기에 감사하고 위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교회에서 선표 되는 말씀이 과연 이런 원리로 선포되고 듣고 있는지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라 무슨 의도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느끼기에 가끔은 하나님 말씀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사용하기에 말씀 선포가 아니라 폭력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의도를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선포해서 그 계획한 일들이 뜻대로 이루어진다고 할지라도

그 일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닐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믿음인지 자신의 욕심인지 모호한 말씀이 선포될 때 나는 상처를 받는다.

비록 나와 상관없는 나에게 타깃을 두고 선포하는 말씀이 아니라 할지라도 말이다.

말씀을 말씀으로 선포돼야 한다.

나는 지금 이런 딜레마에 빠져있다.

바라건대 말씀을 선포할 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을 죽기까지지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전한다는 걸 알아야 한다.

성도도 마찬가지이다.

선포되는 말씀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역사하는 힘이 크기 때문이다.

부디 .. 내가 섬기는 교회가 이런 아름다움 모습이길 바란다.

그래야 역사하는 힘이 크고 나도 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