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에서 마태, 마가 다음으로 나오는 복음서가 누가복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누가복음을 읽으면 마태, 마가 복음보다 쉽게 이해가 되는 걸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은 묶음으로 정리되어 있다 보니 시간과 장소가 뒤섞여 있어서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이 많고
마가복음은 속보 형식을 전개되어 있다 보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상당이 많다.
그렇지만 누가복음은 시간과 장소별로 물 흐르듯이 스토리가 전개되기 때문에 읽다가 다시 위로 올라가서 읽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그래서 읽기가 편하다. 나도 마태, 마가를 읽다가 잘 이해가 안 되면 솔직히 말해서 누가복음에서 다시 읽어야지 하며
대충 읽는 습관이 형성되어 버렸다. 그만큼 누가복음은 정교하게 잘 정리된 책이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누가이다. 누가는 누가 복음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의 저자이기도 하다.
누가는 이방기독교인이며 상당한 교육을 받은 의사이다.
그래서 누가복음서는 직업적인 특성이 잘 나타나있다.
꼼꼼하고 정확하게 잘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누가는 시간을 아주 효율적으로 사용했던 것이 분명하다.
바울과 함께 2차 선교여행부터 합류했는데 바울의 행적을 잘 기록한 점과
또 바울의 주치의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틈틈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나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을 만나며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1장 1절에서 4절에서 보면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
이렇듯 자신의 시간을 지금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분단 위로 쪼개서 시간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이 많은 일들을 할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누가복음은 마가, 마태 다음으로 세 번째 쓰인 복음서이다.
그래서 앞에 빠져 있는 부분들을 참고해서 자기만의 문체로 쓰였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이기도 하다.
대략 신약의 4분의 1의 분량을 누가가 썼다고도 볼 수 있다.
누가복음의 특징은 복음의 보편성에 있다.
하나님의 구속사와 세상의 역사를 연결시켜서 기록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것을 부각시키면서 스토리를 전개 시켜간다.
예를 들어, 2장 1절에 "그때에 가이샤 아구스도가 령을 내려 천하에 다 호적하라"한다든지
3장 1절에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지 열다섯 해에"라고 표현한다든지 이렇게 세상의 역사와 연결시키는
방법으로 쓰여 있다.
그리고 누가복음의 또 다른 특징은 많은 소외 계층을 등장시킨다.
소외된 많은 여성들을 등장시키고 다른 복음서에서 여인이라고 표기한 것을 이름을 정확히 명시한다든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라든지 탕자의 이야기라든지 세리 삭개오의 이야기라든지
심지어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누가 자신이 어디에 관심이 많은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장면을 자주 보여 준다.
그리고 다른 복음서에는 볼 수 없는 특징 중의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성령의 역사를 강조한 것이다.
예를 들면, 스가랴의 세례 요한의 이름을 성령의 역사를 통해 짓는 장면이라든지 시므온에게 약속을 성취하는 장면이라든지
엘리사벳의 고백의 장면이라든지 성령을 통해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는 장면이라든지 또 누가복음에 만 등장하는
칠십인의 제자들이 돌아왔을 때 예수님이 성령으로 인해 기뻐했다는 기록이라든지 부활 이후에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임재를 약속하시는 장면 등 많은 부분에서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다른 복음서들과 차이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누가복음은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강조하고 있다.
그 예로 세례 요한의 출생과 예수님의 잉태 부분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이렇듯 완벽한 인간의 몸을 빌어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부터
또 그 예수님이 자라가는 과정과 마지막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과정까지
모두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부각시켰다.
이렇게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은 모든 사역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하고 있다.
그 이유는 십자가의 사명을 위함 때문이다.
나는 누가복음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많은 여성들의 등장이었다.
그 당시는 여자는 숫자를 세는 데 포함되지 않는 존재였다.
그 예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오병이어 사건에도 여자와 아이들은 숫자에 포함되지 않은 그런 존재였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엘리사벳, 마리아, 안나등 구체적으로 이름을 적었다는 것이 인상 깊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인상 깊었던 것은 예수님을 간절히 기다라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점이었다.
2장 25절에 보면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을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다.
그리고 2장 35절에 "안나"라는 선지자가 있다. 두 사람은 모두 예수님을 고대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나타나셨다.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만나고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이렇게 찬양함을 볼 수 있다.
말씀 가운데 집중적으로 묵상한 구절은 11장 33절에서 36 절이다.
이 말씀은 앞에 마가복음에도 있어서 그때부터 오늘까지 계속 묵상한 말씀이다.
왜냐면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지만 이번엔 좀 새롭게 다가왔다.
그런데 누가복음을 읽으면서 "아! 내가 왜 자꾸 이 말씀이 머릿속에 맴돌았지?"라는 질문에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당시 이스라엘의 가옥은 창문이 작아 다소 컴컴했다고 한다.
그래서 낮에도 불을 켜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등경에 불을 켜야만 내부를 잘 볼 수 있었다.
흔히 우리가 아는 빛된 자녀로 살아라!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어라!
이 말도 맞지만 나는 등불보다는 눈이라는 단어에 집중했다.
그래서 진짜 눈을 감고 조용히 있어봤다.
진짜 눈을 감으니까 마음도 어두워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내린 생각은 눈은 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눈이 진리를 보지 못하면 내 마음도 진리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실 등경의 불은 찬란한 빛이 아니다.
그 집을 온전히 밝히는 빛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등경의 불은 미약하지만 그 공간을 밝혀 준다.
내 몸이 등경이되고 내 삶이 진리의 삶을 산다면 내가 있는 그 공간은 찬란한 빛은 아니지만
나를 통해 진리를 밝히고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통해 예수님의 진리를 보여 줄 수 있다.
이 묵상의 포인트를 나는 앞절에 있는 "복이 있는 자와 악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이 말씀에서 찾을 수 있었다.
11장 27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이다.
복이 있는 자에서는 핵심이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이다.
그 말씀 후에 예수님은 악한 세대는 표적을 구하고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표적을 구하는 이 악한 세대는 눈이 어둡고 마음이 어두운 움 속에 나 말 아래에 감추어진 등불과 같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를 보지 못한다.
진리를 모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복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표적을 구하는 악한 세대에게 예수님은 등경 위에 놓인 등불과 같은 삶을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눈을 열어 진리를 보고 그 마음을 어둠이 아닌 빛에 두고 산다면 우리는 진정 복이 있는 사람이 된다.
또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 줄 수 있다.
그리고 등불은 필요한 곳을 위해 움직여야 한다.
가만히 한 곳에만 둔다면 귀중한 것을 다 찾을 수 없다.
필요한 곳을 위해 등불을 들고 움직이며 물건을 찾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이 이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마가복음 때부터 계속 질문을 갖게 하셨다.
날마다 나에게 필요한 말씀으로 채워 주시고 진리의 눈을 뜨게 하셔서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