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는 삶

마가복음을 끝내며

차작가 2023. 10. 18. 12:04
 

처음 마가복음을 접했을 때 마가복음의 배경을 전혀 알지 못했었다.

그래서 다른 복음서와 다르게 마치 속보 뉴스처럼 긴급하게 진행되는 느낌이 강해서 성격이 급한 사람이거나

마가가 예수님의 제자는 아니기에 쫓아다니며 간략하게 메모한 것을 엮어 만든 책이라고 생각했었다.

마치 속보를 현장에서 기자가 취재해서 "속보요! 속보요!" 하며 한 장에 프린트 물을 동네에 뿌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서야 마가가 처한 시대의 배경을 알고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알게 되었고

마가복음에 대한 은혜보다는

마가 청년이라는 사람에 대해 짠한 마음이 들면서 마가를 사랑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마가의 인생에 대해서 은혜를 받았다,

마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가의 다락방에 나오는 그 마가이다.

마가는 다락방에 120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집을 소유한 부자 청년이었다.

그리고 유명한 바나바의 조카였다.

또 베드로의 제자이기도 하다.

사도행전에 보면 마가와 바나바와 바울과 선교 여행을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가가 중도 하차하는 사건이 생긴다.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향수병과 험난한 사역을 앞두고 부자로 자란 마가가 적응하지 못해서 중도 하차했다고 하나

내 생각에는 소명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도중하차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 사건 이후에 2차 선교 여행 때 바나바는 다시 한번 더 마가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서 바울에게

마가를 데려갈 것을 권하지만

사도행전 15:38에 보면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이 말씀에 보면 바울을 마가를 데려가는 것을 원치 않았고 이 일로 바나바와 바울을 심히 다투었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함으로 둘은 갈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디모데 후서 4장 11절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려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리라"

이렇게 바울은 후회를 했다.

사도행전에서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라고 호칭했던 마가를 유익한 자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처음에는 중도 하차했던 마가였지만 소명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바나바의 위로를 통해 회복되면서 변화되었고

그 변화된 삶을 통해서 많은 열매를 맺었을 것이고 그 소문은 바울에게 알려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경험한 우리 청년 때의 모습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동질감을 느꼈다.

베드로가 "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마가를 칭호 했다는 것은 마가는 제자들의 비해서 나이가 아주 어린 청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시절은 누구나 좌절하고 실패를 경험한다.

그런 마가에게 바나바와 같은 위로자가 있었다는 게 너무 감사하다.

바나바가 없었다면 오늘의 마가는 성경에서 찾을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다시 그 시대의 배경을 살펴보면 마가가 처했던 시대는 로마 네로 황제 시기였다.

네로 황제 시대에 큰불이 난 사건이 있었다.

그 불은 도시 전체를 태우는 아주 큰불이었다.

그 당시 네로 황제가 미쳐서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돌자 원성이 네로에게 향하니까

누군가에게 책임 전가할 대상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인이었다.

그래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원형경기장에 잡혀가서 사자들에게 뜯겨 죽임을 당했고 또 많은 사람들은

불속에 던져져 산 채로 죽는 사건이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게 되었다.

그리고 기독교는 움츠러들고 복음의 힘은 많이 쇠퇴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청년 마가는 마가복음을 기록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최초의 복음서이다.

마가복음서가 쓰인 이후에 마태, 누가, 요한복음 순서대로 씌었다.

즉, 이 말은 처음 쓰인 마가복음을 보고 제자들이 그것에 빠진 부분을 채우거나 강조하거나 그런 방법으로

나머지 복음서들이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가는 베드로의 제자이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전해 들은 예수님의 이야기가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잡혀갈 때 홑이불을 두르고 있던 한 사람이 이불을 던지고 알몸으로 도망간 청년이 마가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주위에서 예수님의 사역들을 바라본 것을 적은 부분도 있을 것이다.

마가복음의 기록 목적은 로마에 살고 있는 이방인 기독교인들을 향하고 있다.

처음 내가 느낀 마가복음이 마치 뉴스 속보와 같았던 것은

마가가 처했던 로마시대 기독교 박해를 떠 올린다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래서 문장 중간중간에 자주 등장하는 "즉시"라는 단어를 자주 한다든지, 예수님의 중심으로 쓰인 문장이라든지,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강조한다든지 긴급하게 스토리가 전개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은 잡혀가고 죽임을 당하고 사람들의 믿음은 사라져가고 예수님에 대한 기록은 아무것도 없는 이런 상태에서

마가가 급하게 예수님의 속보를 적어서 길거리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상상을 하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속보"를 외치는 청년 마가의 얼굴을 생각하면 1차 전도 여행 때 중도하자 한 마가의 모습은 없고

목숨을 내어 놓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마가의 얼굴이 그려진다.

마가복음에서는 마가 자체가 나에겐 은혜였다.

말씀 중간중간에 "예수님의 소문이 사방에 퍼지더라" 이런 표현과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여"라는 표현들이 자주 나온다.

마가가 기대했던 것은 아마도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가복음 2장 23~28 말씀은 마가복음을 끝내기 전에 하루 종일 내 머리에 맴돌았다.

이 말씀은 안식일에 관한 말씀이다.

28절에 보면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여기 "에도"라는 단어가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바리새인들이 밀 이삭을 잘라먹는 제자들을 비난하자 예수님이 다윗의 이야기를 들면서 하신 말씀이다.

안식일에도 라는 표현은 평일뿐만 아니라 주일에도 예수님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요즘 현실에서 적용하자면 평일은 예수님이 주인이고 주일에도 예수님이 주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물론 모든 날이 예수님의 것이다.

그 위에 말씀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요 사람이 안식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니"라는 말씀이 있다.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안식일은 그들이 만든 규범으로 지키는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하나님도 사람도 위한 안식일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안식은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안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들의 방법으로 안식일의 고유한 의미를 훼손 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만든 규례를 지키는 게 안식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안식일의 주인은 바로 그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의 잘못을 꾸짖는 말씀이다.

안식일의 진정한 주인은 그들이 만든 규례가 아니라 예수님이 이시다.

예수님 안에 진정한 안식일이 되길,,,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날이 주의 것임을 알게 하셔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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