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는 삶

유다서를 끝내며

차작가 2023. 10. 19. 11:02

유다는 자신을 야고보의 형제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라고 자신을 설명한다.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였지만 자신을 예수님의 종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유다는 야고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다.

유다서의 수신자는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으나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 기독교인들로 보인다.

유다서 5절~16절에서 보면 소돔과 고모라 천사장 미가엘 모세 가인 발람 에녹 등 구약의 내용이 많이 언급된다.

그래서 수신자는 유대인 기독교인들로 추정된다.

그리고 유다서의 특징은 한 편의 시처럼 은유적인 표현이 많이 나온다.

유다는 문장 표현 방식으로 볼 때 문학적인 자질이 풍부한 사람인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표현은 12절에서

"바람에 불려 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가을 나무요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이 표현은 정말 시적이고 아름다운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어쩜 이렇게 멋지게 표현했나! 감탄사가 나왔다.

유다서의 특징은 세 개씩 나눠 표현한 문장 방식이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종, 형제, 유다"

"긍휼, 평강, 사랑"

"경건하지 아니하여,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그리고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비방" 하는 등의 세 개씩 묶어서 표현하는 방법이 돋보인다.

이것은 시를 잘 알거나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작가의 의도를 잘 느낄 수 있다.

유다가 유다서뿐만 아니라 성경 외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나 예수님에 대한 시나 자연에 대한 시나

일상생활에서 경험한 것에 대한 시를 많이 썼을 거라고 상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도 시를 좋아하고 시를 자주 쓰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다.

또한 유다서는 비정경적인 유대 문학인 에녹 1서와 모세의 승천이라는 현존하진 않지만

초대 교부를 통해 알려진 책을 인용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편지를 쓰는 목적에 대해서는 3절에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라고 밝히고 있다.

유다서는 25절 밖에 안되는 짧은 서신이지만 이단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이단을 향해 강하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는 말씀이다.

요한 1서의 배경과 유사하게 이단의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영지주의에 대한 경고를 하는 것이다.

영지주의는 신 플라톤주의를 기본 철학으로 하여 거기에 다른 사상들을 뒤섞여 놓은 이단이다.

그 당시 스토아 철학 사상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같은 사상을 마구 뒤섞어 놓은 것이다.

요한 1서와 조금 다른게 유다서에 나타난 영지주의 이단은 역사적으로 볼 때 형식이나 형태가 다양하게 등장한다.

특히 육체와 관련한 도덕 무용론에 가까운 방탕 영지주의적 요소를 강조했던 자들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방탕 영지주의는 육체란 악한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사용되든지 구원과 관련 없다고 말한다.

즉 영과 육을 분리해서 영은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부도덕하게 사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유다서를 기록한 이유는 성도들을 미혹시키고 있는 이런 영지주의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이다.

그런 시대적 배경을 잘 이해하고 유다서를 읽어야 한다.

그리고 유다서는 25절이 있는데 최소 15개 구절이 베드로 후서 2장과 겹친다.

둘 다 유사하거나 동일한 용어를 사용해서 거짓 교사들의 주장에 논박하는 것을 볼 때 같은 이단을 염두에 두고 썼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앞에서 설명했다시피 거짓 선생들을 향한 비난을 적은 것도 시처럼 아름다운 표현법에 감탄했다.

무거운 내용을 다뤘는데도 불구하고 어쩜 이런 표현들을 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은유적인 표현을 쓰는 유다를 보면 직선적이거나 거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다.

내 주위에 이런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상상도 했다.

그러나 이 문체에만 집중해서는 안 된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왜냐면 거짓 교사들에 대한 심판과 어떻게 그들을 대응해야 되는지 다소 무거운 책이기 때문이다.

10절에 보면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 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이런 거짓 선지자들은 지금도 우리 주위에 많다.

내가 하고 있는 블로그에도 자주 들어와서 댓글을 달기 때문이다.

여러 번 신고하고 차단하고 삭제하지만 어김없이 또 나의 블로그를 더럽히고 있다.

알지도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 자, 이성 없이 짐승 같은 본능으로만 아는 그것으로 멸망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현실 속에서 자주 접하는 이단들에 대해서 우리는 올바른 자세를 취해야 한다.

우선 진리를 바로 알아야만 거짓을 분별할 수 있고 그 거짓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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