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개, 스가랴, 말라기는 포로기 이후 페르시아를 배경으로 한 선지서이다.
학개와 스가랴는 동시대의 인물들로 페르시아의 세 번째 왕 다리오 1세 때에 서로 힘을 합쳐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는 일을 독려했다.
다리오 1세는 역사적으로 주전 490년에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 군과 싸워 군사적 수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아테네의 전술적 전략에 밀려 패배한 왕이다.
그때 아테네의 한 병사가 승리의 소식을 알리기 위해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까지 뛰어가 "승리했으니 항복하지 말라"라는 소식을 알리고 죽은 것이 계기가 되어 오늘날 마라톤 경기가 그때 뛴 거리인 42.195km가 되었다.
다리오 1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는 "영웅들의 통치자"라는 뜻이다.
이 왕이 구약에 나오는 에스더의 남편이자 히브리식 발음으로 "아하 수에로 왕"이라는데 대체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학개는 예언의 메시지를 전한 날짜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구약에서 가장 연대가 정확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학개는 약 4개월에 걸쳐 여호와께서 주신 네 번의 메시지를 기록한다.
이때가 주전 520년이다.
그 당시 그룹 바벨은 유다의 총독이었으며 여호수아가 대제사장 이었다.
다른 선지자는 메시만 전하였는데 학개는 성전 건축이라는 성과를 내야만 했다.
66년 전에 파괴된 성전을 재건하는 일은 포로기 이후에 페르시아 일대에 흩어져 살던 이스라엘 디아스포라들이
예루살렘에 귀환하여지어야만 했다.
학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집 짓기에만 바쁨을 보고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는 것에 열심을 보이지 않음을 비판하며 동기 부여를 하는 것이 주된 사역이었다.
바로 그들에게 영적인 우선순위를 일깨어 준다.
성전 건축은 여호와께 드리는 예배를 회복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왕국과 메시아의 시대의 도래를 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이 어려운 이유는 바로 성전 건축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그들을 비판했다.
백성들은 이 메시지를 청종하며 즉각 하나님의 성전 공사를 재기한다.
그러나 이 메시지를 현대 교회 건축에 대한 동기부여를 위해 대입해서는 안 된다.
당시의 성전의 의미와 현대의 교회 건축은 전혀 다른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학개는 네 번에 걸친 메시지를 통해 성전 건축을 촉구하며 축복의 약속과 다윗 왕국의 회복과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예언한다.
성전은 4년 만에 드디어 완성된다.
이때가 주전 516년이므로 성전이 파괴된 586년으로부터 정확히 70년이 지난 후 성전이 다시 재건되게 된다.
많은 학자들은 이때를 70년의 포로 생활이 상징적으로 마감된 때로 본다.
이 성전은 스룹바벨의 리더십 하에 완공되었다고 해서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부른다.
학개 이름의 뜻은 "나의 절기"라는 의미인데 절기란 축제를 상징하므로 그 이름의 뜻은 "나의 축제일"이다.
이름 그대로 성전을 완성해서 축하하게 된 것이다.
첫 번째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이고 두 번째는 스룹바벨 성전이고 세 번째는 신약시대의 헤롯 성전이라 부르는데
결국 이 모든 성전들은 파괴되었다.
현재까지 예루살렘의 성전은 건축하지 못한 상태로 남아있다.
그곳의 현재는 회교도의 삼대 성지 중의 하나인 모하메드가 승천했다고 전승되며 황금동이라 부르는 무슬림 바위사원이 새워져 있다.
이 바위사원 자리에 언제 성전이 다시 세워질지 관심이다.
무슬림들이 여호와를 믿는 날이 오기를 기도해야 한다.
(성경 에센스 학개 편 김윤희 교수 참조)
학개 묵상을 하며 와닿았던 말씀은 학개가 삶의 우선순위의 중요성을 말씀하는 부분에서였다.
단순해 보이는 이 우선순위는 가장 어려운 부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매일의 계획도 세워보고 1년 계획도 세워보지만 때로는 내 중심적인 계획에 우선순위를 둘 때가 많이 있다.
작년부터 나는 하나님 중심의 우선순위를 두고 계획을 세우고 보내고 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때로는 나의 것을 포기해야 될 순간이 있다.
그리고 이런저런 이유로 타협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다.
비교적 루틴을 벗어나는 것을 힘들어하는 성향이라 지키는 것은 어려움이 없지만
하나님을 우선순위를 두고 한 계획일지라도 때로는 나를 위한 것인지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 혼동될 때도 있다.
왜냐하면 지키지 않는 것이 나의 성향에 맞지 않아 내가 세운 계획에 벗어나는 것이 불편해서 지키는 것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내 중심이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 혼동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로는 이웃을 위해 시간을 배려해야 하는데 율법적으로 이것을 행하는 것이 아닌지 스스로에게 질문할 때도 있다.
그러나 무엇이든 간에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면 이것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는 것은 명확하다.
오늘 1장에서 반복되는 질문이 있다.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1:5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1: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건축을 앞두고 우선순위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에게 둠으로 자신의 집을 짓는 것에 집중하는 것을 보며
학개 선지자가 백성들을 향해 말씀한 구절이다.
1:9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열매가 나를 위한 것인지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둔 것인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1:10 그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10절 말씀은 우선순위를 두는 것에 실패했을 때 나타나는 결과이다.
즉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가 좋지 않다.
만약 내가 이런 결과를 얻는다면 나 스스로에게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