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제자 마태에 의해 쓰였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제자들을 소개할 때 이름만 나열하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유독 세리 마태라고 이름 앞에 세리를 붙이고 있다.
이는 마태 본인의 부끄러운 직업을 나타내려는 겸손한 의도로 보인다.
그의 직업에 걸맞게 마태복음에서는 "두 드라크마 관세", "네 드라크마 동전", "달란트"등 마태에게 익숙한 돈 단위에 대한
다양한 용어 등이 등장한다.
이것은 마태가 저자인 것을 뒤 받침 해 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마태복음은 신약의 첫 번째 책답게 독자들을 구약으로부터 연착륙을 시키는 등 전반적으로 유대적 성향이 강한 특징이 있다.
그러기에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쓰였다고 본다.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하며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을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부터 사로잡혀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라고 기록하는데 세 간격이 약 1000년 400년 600년임을 생각해 볼 때
열네 대라는 숫자에 끼워 맞추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4라는 숫자는 그 숫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바꾸는 주석 방법인 게마트리아라는 관점으로 보면 다윗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시작부터 예수님이 유대의 왕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아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마태복음은 50회 이상 구약을 직접 인용하고 75회 정도 구약의 사건들을 암시함으로 유대인이 대상이었음을 뒷 받침 한다.
그리고 "하늘의 계신 아버지"라는 표현이 15번 나온다.
마가복음에서는 한번 누가복음에서는 전혀 사용되지 않는 것과 선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하나님이라는 표현 대신 이러한 우회적 표현을 쓴 것도 전형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끼는 유대적 사고를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나라 대신 주로 천국을 쓴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마태복음의 구조도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구약의 오경을 염두에 둔 듯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다섯 군데에 놓아서 구성했다.
5장에서 7장의 산상수훈, 10장의 전도 여행을 보내시며 주신 가르침, 13장의 천국에 대한 비유 모음,
18장의 공동체에 대한 용서해 대한 가르침, 23장에서 25장의 종말에 대한 가르침과 경고의 말씀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듯 예수님의 가르침에 초점을 맞춘 것 또한 마태복음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산상수훈에서는 모세는 그렇게 가르쳤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친다고 하면서 마태가 예수님을 모세보다 위대하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모세의 율법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대비시켜서 예수님의 새로운 모세이실 뿐만 아니라 구약의 모세의 권위를 훨씬 뛰어넘는 분이심을 강조한다.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들이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는 모세의 율법을 폐하시려는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시려고 오셨다고 말한다.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율법을 주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모세의 율법보다 위에 있음을 알려 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처럼 마태복음이 유대적 성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복음의 보편성 또한 매우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의 탄생부터 그분을 경배하기 위해 페르시아로부터 온 동방박사 사건은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으며
이것은 예수님은 유대인 만의 메시아가 아닌 만민의 메시아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천국의 비유에서도 밭은 세상을 가리킨다고 가르치신다.
21장에서는 하나님 깨서 그의 나라를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아 다른 이들에게 주실 것이라 말씀하시므로
복음이 유대인들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인에게 보편성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더불어 4복음서 중에서 마태복음만 교회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모든 족속들을 향한 지상명령으로 서신을 맺는 것 역시
복음의 보편성을 잘 보여주는 증거이다.
복음은 특정한 자, 특정한 민족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것임이 강조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마태복음은 강한 유대적 요소에 복음의 보편성이 더해진 복음서이다.
(성경 에센스 마태복음 편 김윤희 교수 참조)
오늘 나에게 다가온 말씀은 3장 1절에서 8절 말씀이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는 말씀이 그의 삶을 대표적으로 표현하는 말씀으로 알려져 있다.
세례요한은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며 광야에서 은둔 생활을 한 분이다.
이것은 쿰란 공동체의 특징이다.
쿰란 공동체에게 광야는 고난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장소였다.
오실 메시아는 이사야서 11장 1절 말씀의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라고 쓰여 있다.
여기서 한 가지는 히브리어로 연약한, 볼품없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파생된 뜻이 나사렛이다.
그래서 오실 메시아는 나사렛에서 태어나는 것이 예언된 것이다.
1절에 보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회개는 죄를 고백하는 것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세례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한 것 같이 마태복음 4장 17절에도 예수님께서 또 같이 말씀하시고 있다.
진정한 회개는 언약 안에 예수님 안에 들어오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 스스로 구원할 수 없음을 아시므로 우리를 자신의 죽음으로 구원에 동참시키셨다.
마태복음은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이처럼 강조하고 있다.
세례요한의 광야의 삶을 보며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절제하고 간절히 메시아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언약 안에 사람들이 회복되길 간절히 바라는 그 마음을 엿볼 수가 있었다.
세례요한의 삶을 통하여 나는 언약 안에 회복시키시는 예수님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지 생각해 봤다.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 앞에 바로 서있지 못하고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함으로 회개하는 삶을 살고 있지만
완전한 회복을 기대하며 사는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사람들에게 외치는 소리가 되어 살며 회복을 외치는데 나에게는 그러한 외침이 없었다.
진정 내가 내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기대하며 산다면 당연히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도덕적 율법적으로는 그럴싸한 열매를 맺는 것 같지만 온전히 언약의 성취,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며 사는 외침은 보이지 않았다.
만약 내가 예수 안에 올바른 회복을 경험한다면 온전히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을 고대하며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한 눈물이 아니라 예수님을 간절히 바라는 눈물이 있어야 함을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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