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까지 테네시에서 머물다가 오늘은 테네시를 거쳐 아칸사스에 왔다.
테네시는 나무가 울창하고 서늘했는데 아칸사스에 오니 햇볕이 따갑고 더워지기 시작했다.
시간도 동부와 1시간의 시차가 생겼다.
그래서인지 조금 피곤하다.
되도록이면 내일 달라스 근처에 도착하려고 조금 무리해서 달려와서인가 보다.
차 속에서 오늘 묵상 말씀에 해당되는 강해 설교를 많이 들었다.
그중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는 말씀과 성전을 깨끗이 하시는 11장을 나누고자 한다.
오늘 나눌 말씀도 마가복음의 특징인 샌드위치 구조로 되어있다.
한 가지 이야기 사이에 다른 이야기를 집어넣어 원래하고 자 하는 이야기의 의도를 분명하게 하려는 목적을 가진 구조이다.
마가복음 11장 20절에서 21절에 보면
11:20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11: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예수님이 잎만 무성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는 무화과를 보며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라고 하시는 사건이 있었다.
그다음에 바로 예수님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는 사건으로 스토리가 전개된다.
무화과나무 스토리 중간에 삽입된 말씀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성전 안에 매매하는 자들을 내 쫓으시고 환전하는 사람들의 상과 의자를 둘러엎으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17절과 같이 말씀하신다.
11: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그 당시 유월절에 예배하러 올 때 사람들은 번제 드릴 양을 먼 곳에서 가져와야만 했다.
그러나 성전에서 장사의 목적으로 그들의 양에 흠집을 잡아 거부하고 성전에서 파는 비둘기나 양들을 억지로 강매하게 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이 당시 헤롯왕은 정치에 능한 사람이었지만 유대인들에게는 혈통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에서의 족속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성전을 크게 짓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환심을 사려고 했다.
로마 정부로부터 예루살렘의 땅의 큰 부분을 예루살렘에 성전 건축을 허가받고 크게 짓고 있었으나 완공이 늦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제물로 드릴 동물을 판매해서 즉 백성들의 혈세로 성전을 건축하게 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강도의 소굴"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 당시 현실을 예수님은 지적하신 것이다.
아 말을 들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죽일 것을 꾀하였다.
자신들의 악함을 비판하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교훈을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따랐기 때문이다.
이 자체가 그들에게 두려움이 되었다.
바로 이스라엘의 현실을 지적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무화과나무의 스토리로 이어진다.
이것을 기억하고 있던 베드로가 예수님께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다고 말한다.
여기서 저주는 심판이라고 하는 것이 올바른 번역이다.
심판은 저주의 앞서서 행해지는 일이다.
모든 사람은 심판은 동일하게 받게 되어 있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심판은 동일하게 받되 저주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받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심판과 저주의 차이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성전을 엎으시는 모습과 무화과를 심판하시는 내용은 동일하게
예수님이 저주하신 무화과나무는 그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24절에서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받은 줄로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25절에 보면
11: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기도하고 용서하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랍비여"라고 부른 것으로 보면 예수님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무화과나무가 열매 매지 못하는 이유가 세 가지가 있다.
바로 24절에서 25절에 힌트가 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고
두 번째는 기도하지 않는 것이며
세 번째는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세상으로 흘려보내야만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이유이다.
믿음이란 우리가 노력한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자 은혜이기 때문이다.
22절에서 "하나님을 믿으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라"가 더 정확한 표현이다.
믿음은 우리가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믿음을 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24절에 기도하라는 것도 대부분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
마치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과 같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 인내와 용서하심을 우리가 알기에 이 열매를 맺어야 한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외식함으로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을 향한 안타까움이며
무화과처럼 우리가 삶 속에서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을 향한 안타까움이다.
바로 무화과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나는 삶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지
나는 기다림으로 기도하고 있는지
예수님이 나를 용서하시는 그 용서를 삶에서 실천하고 있는지
즉 열매를 맺고 있는지 돌아 보는 시간이 되었다.
(CBS 성서학당 마가복음 편 참조)
'매일의 말씀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복음 4장에서 10장 묵상 (0) | 2023.10.08 |
---|---|
누가복음 1장에서 3장 묵상 (0) | 2023.10.06 |
마가복음 4장에서 10장 묵상 (0) | 2023.10.05 |
마가복음 1장에서 3장 묵상 (0) | 2023.10.05 |
마태복음 24장에서 28장 묵상 (0) | 2023.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