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1-2절에서 보면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
사울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위협하고 "살기가 등등"한 사람이었다.
그는 대 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의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했고 "예수를 믿는 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만나면 남녀 불문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는 자였다.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을 박해하던 사울은 다메섹으로 향해 가던 중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예수님을 그를 부르신다.
9: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9: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이방인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 사울은 택하심을 받았고 또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됨을 말씀하시며
사울에게 모두 보이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런 사울은 바나바와 함께 1차 선교여행을 떠나게 되었고 처음으로 안디옥에서 교회를 개척했다.
13장 51절에 보면
13:51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전혀 예수님을 모르는 이방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바울을 택하셨는지 알게 하는 구절이 나온다.
거친 그 땅엔 개척자와 같은 바울이 필요했던 것이다.
흙을 뒤집어 보물을 찾아내고 그 땅을 개척할 바울과 같은 성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발의 티끌을 털어버리는 바울의 행동을 보며 예수님을 정말 만났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이 자신감! 그리고 완전히 믿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릴 수 있는 그 열정! 그것은 바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선교였다.
그는 제자들과 "예수의 도"를 믿는 사람들을 향해 "살기가 등등"해서 박해를 가한 그런 사람어었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면 그 일을 끝까지 완수하고야 마는 그런 성품이다.
이것은 참 믿음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다.
15장 40-41절에 보면
15: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15: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그런 바울이 실라와 함께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는 말씀이 나온다.
개척도 하지만 교회가 믿음 안에 바로 설 수 있도록 견고하게 하여 자신이 믿는 예수님을 반석 위에 세운 집과 같이
믿음에 설 수 있도록 견고하게 돕는다.
왜냐하면 그가 이 믿음으로 인하여 9장 16절과 같이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라는 말씀을 보고도 순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 믿는 데는 고난이 따른다. 믿음이 견고하지 않으면 이 고난을 이길 수 없기에 견고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 자신이 받을 고난이 죽음인 것을 알면서 그는 복음을 전한 것이다.
믿음이 없다면 순종은 불가능하다.
16장에서 바울은 디모데를 만나고 그와 함께 선교 여행을 떠난다.
환상 가운데에 바울은 마케도니아 롤 떠나게 되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게 된다.
마케도니아 지방의 첫 성(첫 성이란 그 도시에서 가장 큰 성을 뜻함) 빌립보에서 자색 옷 장사를 하는 루디아를 만나고 그녀에게 세례를 베푼다.
보통 회당이 있는 지역은 유대인이 많이 사는 지역이다.
그런데 루디아를 만난 빌립보에는 회당이 없었다.
그저 강가에서 하나님이 루디아를 만나게 하셨다.
회당이 있는 곳은 반드시 핍박이 왔고 회당이 없는 이방인 지역에는 핍박이 없이 복음이 편만이 전해 짐을 볼 수 있다.
루디아를 만난 이후 귀신들린 여종을 만나고 그 여종을 사로잡고 있던 귀신을 쫓고
또 그 일로 귀신들렸던 여종이 점을 치지 못함으로 그 주인 돈을 벌지 못하자 장터에 있던 관리에게 끌어가서 고발하고 옥에 갇히게 된다.
그곳에서 옥을 지키는 간수들과 죄수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서 빌립보에서 최초의 교회가 세워진다.
빌립보 교회는 이렇게 루디아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그곳에 모였던 여인들, 귀신들렸던 여종, 간수와 그의 가족들, 죄수들 이렇게 보잘것없는 사회적 약자로부터 교회가 생기게 된 것이다.
바울은 옥에서 나가라고 해도 37절에 보면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 보내고자 하느냐"라며
자신이 로마 사람인 것과 죄목도 모르면서 때리고 가두었던 것을 말한다.
할 소리를 다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냥 내 보내는 게 아니라 장터에 있던 관리들이 직접 와서 자신들에게 해명을 하고 데리고 나가야 된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이런 성품을 볼 때 왜 하나님이 바울을 교회를 개척하는 곳에 사용한 것인지를 느낄 수 있다.
그 후에도 데살로니가에서도 선교하고 신사의 도시 베뢰아에서도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성경에서는 아덴이라고 표현되었지만 이곳은 그리스 아테네를 말한다.
아테네는 우리가 잘 아는 철학가들이 많이 나온 도시이다.
그들은 새로운 학문들을 듣는 것을 좋아하고 지적인 것에 시간을 많이 보내는 사람들이다.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 등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철학가들이 많이 나온 도시였다.
그곳에서도 예수님을 증거한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에서도 전도한다.
고린도에서 로마 글라우디오 왕 때 기독교가 소동을 일으킨다는 죄목으로 모든 기독교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때 많은 믿는 사람들이 각처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중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고린도에 오게 되었고 바울을 만나 함께 천막을 만들며 전도하게 된다.
안식일 때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이 18장 6절에서 보면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라며 바울의 기질에 맞게 그들에게 응대함을 볼 수 있다.
바울은 확신에 차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담대히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바울의 기질이 개척자로서 사용되기에 가장 적합했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주도면밀하고 계획적이고 진취적이고 또한 섬세했다.
고린도 선교를 끝내며 다시 안디옥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처음 세운 교회에 다시 돌아가 재 점검하는 것이다.
달리는 말처럼 뛰어다니며 선교도 하고 가르치고 제자 삼고 다시 견고케 하고 처음으로 돌아가 점검하는 모습을 보며
바울이 얼마나 주도면닐한지 무엇보다도 충성된 일꾼인지 느낄 수 있다.
사도로 부르실 때에 이미 그의 죽음을 보여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충성된 일꾼으로서 그의 모든 인생을 주님께 내어 드림을 느꼈다.
나는 바울과 같은 삶을 살 수 없다.
왜냐하면 바울과 바나바가 다른 것처럼 하나님은 성품대로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바울을 온유하게 그의 부족한 부분을 감싸는 바나바가 있는가 하면 묵묵하게 그의 리더십을 잘 따르는 실라와 디모데가 있고
처음 선교여행을 떠날 때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했던 요셉(마가)도 있다.
마가는 중도 하차했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그를 지켜 주는 모습을 보며 그때는 함께 할 수 없었지만
어떠한 순간에는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는 게 하시는 관계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생각하게 했다.
하나님은 다양한 성품을 사용하셔서 택함 받은 사람을 부르셔서 사용함을 배울 수 있었다.
나는 바울과 같은 역할을 감당할 수 없지만 그중에 어떠한 모양으로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시리라 신뢰한다.
그게 한 간수의 모습이든 루디아이든 처음엔 중도 하차했지만 끝까지 사명을 감당한 마가의 모습이든
불같은 바울 곁에서 수시로 불을 감싸 안은 바나바의 모습이든
어떠한 모습도 하나님은 귀히 사용하심을 신뢰하며 순종하길 자신은 없지만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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