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 후서는 고린도 전서를 쓰고 난 후에 얼마간의 세월이 지난 후에 쓰인 서신서이다.
고린도 전서 이후에 몇 차례의 편지가 더 왔다 갔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편지로 해결하려고 헸던 일들이 정황상 잘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에서 편지를 써서 디도 편으로 고린도 교회에 보냈다.
고린도 후서 7장 8절에 보면
"내가 편지로 인해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이라는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고린도 후서는 "근심의 편지" 또는 "비통한 편지"라고 불린다.
왜냐면 바울의 상한 마음과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섭섭한 마음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디도를 통해 편지를 전했으나 소식이 없자 그 일로 인해 많이 힘들어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디도가 도착하고 디도 편으로 교회가 그 편지를 기쁘게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그들의 회개를 기뻐하는 것을 전함과 동시에 또한 자신을 여전히 대적하는
소수의 무리를 향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고린도 후서의 기록 목적은 자신의 편지를 읽고 회개한 성도를 향한 기쁨과 위로를 전하고 또한
헌금 참여를 독려하고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변론하는 데 있다.
고린도 후서는 서신서로서 독특하고 뛰어난 문학 작품이다.
바울이 당면한 고난을 진솔하게 고린도 교회에게 뛰어난 문체로 표현하는 데 있어서
읽는 자로 하여금 그 마음을 느끼기에 충분한 영성을 담고 있다.
이 편지를 읽다 보면 마치 바울이 앞에 앉아서 우리에게 독백으로 이야기를 하는 듯한 마음이 들어서
눈물이 저절로 나올 정도였다.
자신이 한 사람 사람을 양육해서 세워 놓은 리더들이 바울의 진심을 알아 주지 못하고
오해를 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표현하는 한 문장 한 문장이 마치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도 깨닫지 못하는 우리와 같았다.
그리고 바울은 문제를 일으키는 소수를 향해 치리를 단호하게 내리기를 결단하고
교회를 교회답게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마음으로 권면하는 모습을 말씀 속에 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 고난 중에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고린도 후서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있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에 관심이 더 많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
4장 18절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니라"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보이는 것에 마음이 쏠려 있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큰 사도들의 가르침에 현혹되어 있었기에 바울의 권위를 무시했다.
그들의 잘못은 바울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에 있는 게 아니라 바울이 전한 복음을 왜곡하는 것이 문제였다.
바울은 이 마음을 경고한 것이다.
바울이 편지를 통해 강하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 것은 그들을 넘어뜨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말씀 안에 세우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고린도 후서는 고린도 전서보다 어렵고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말씀이었다.
짧은 목회자의 삶을 살며 바울의 마음을 많이 공감하게 되었기에 고린도 후서는
공감의 책이며 사역자의 눈물의 책이었다.
고린도 교회는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바울이 천막을 짓는 일을 하며 세운 교회였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이 바울의 사도의 직분을 의심하고 추천서를 요구하고 또한 사례비를 받지 않는 것도 의심하고
거짓 사도들의 공격을 받는 일을 겪었다.
마게도냐에서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가슴 아파하며 그들을 향해 편지를 쓰는 바울을 생각하니
나는 과연 저런 부모의 심정으로 편지를 쓸 수 있었을까? 아마도 나는 "나와 상관없다" 하며 인연을 끊었을 것 같다.
고린도 후서에서 가장 눈물이 났던 말씀은 11장 말씀이다.
바로 거짓 사도들에 대한 말씀이다.
사람들이 바울을 향해 글을 잘 쓰나 말에는 어눌하다고 비판하는 것을 향해 바울은
"나의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해 열심을 낸다. 왜냐하면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하기 위해서이다"라고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고 자신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임을 말하며
자신은 약하나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강하게 역사하심을 드러내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억울한 감정을 표현했다.
"너희들은 다른 복음을 받을 때는 잘 용납하는구나!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지만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한다.
이 사실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다. 그런데 너희는 너희를 높이고 나를 낮추어서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했는데 이것이 죄가 되느냐? 너희를 위해서 복음을 전하고 섬길 때
아무 댓가도 받지 않았다. 때로는 부족했지만
누를 끼치지 않았다. 마게도냐 향제들이 나의 부족함을 다 보충해 주었다.
그렇지만 너희에게는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그런데 거짓 사도들이 또 속이는 일꾼들이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가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이 일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일은 사탄이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니 사탄의 계략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이 어눌하다고 나를 어리석은 사람으로 여기지 말아라.
나는 내가 가진 것을 조금도 자랑할 마음이 없다. 그렇지만 너희들이 나를 어리석게 여기기에
너희처럼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너희처럼 나도 자랑해 보겠다.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다.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다. 나는 복음을 위해 매를 맞고 돌에도 맞고
세 번이나 파선도 당하고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도 당했다. 그리고 수고했으며 애썼으며 잠도 못 자고 주렸으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다. 그 외에도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다.
너희들 중에 누가 약하면 나도 약해지고 누가 실족하면 내 마음이 애타지 않겠느냐.
내가 할 수 없이 자랑하는데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한다. 예수께서 내가 거짓말하지 않는 것을 안다"
11장 말씀을 내 나름대로 해석해서 적어 보았다.
이렇게 바울의 심정이 되어서 말씀을 읽으니까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바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고
내가 얼마나 부족한 일꾼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단언컨대 고린도 교회는 최고의 목회자를 만나는 축복을 누렸다는 것을 감사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나도 이런 목회자를 만나고 싶다는 그런 마음이 들었다.
비록 우리들이 섬기는 교회에 이런 목회자가 흔치 않기에 만날 수 없지만 우리가 섬기는 교회의 목회자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들을 사랑하고 기도하는 성도가 되길 소원한다.
'다시 사는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베소서를 끝내며 (0) | 2023.10.18 |
---|---|
갈라디아서를 끝내며 (0) | 2023.10.18 |
고린도전서를 끝내며 (0) | 2023.10.18 |
로마서를 끝내며 (0) | 2023.10.18 |
사도행전을 끝내며 (0) | 2023.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