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는 삶

야고보서를 끝내며

차작가 2023. 10. 19. 10:47
 

야고보서의 저자는 누구인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라고 전해진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었지만 예수님이 메시아인 줄 믿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세우고 공생애를 시작할 때까지는 예수님이 메시아인 줄을 알지 못했다.

그런다가 예수님이 십자에게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메시아인 줄을 알게 되었다.

비로소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보고 예수님의 종이 되었다.

1장 1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라고 시작된다.

드디어 야고보는 예수님을 "주"라고 영접하고 자신을 '종'이라고 고백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게 된다.

야고보는 예루살렘의 교회를 담당하는 목회자였다.

야고보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예루살렘의 여러 교회를 담당하는 감독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기독교인들이 많은 핍박 가운데 놓이고 흩어졌을 때 그들의 둔탁해진 신앙을 바로잡기 원해서 이 서신서를 썼다.

야고보서가 쓰인 연대는 저자에 대한 의견만큼이나 추측이 다양하지만 연대 미상이다.

야고보서의 형식은 서신서이고 공적인 내용을 담은 회람 서신서 형태를 취한다.

공석에서 성도들에게 읽히도록 쓰인 설교 같은 느낌을 준다.

야고보서가 쓰인 배경에는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목회할 때 핍박으로 인해 교인들이 사방으로 흩여져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이 여러 어려운 문제에 직면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야고보가 담임목사의 심정으로 서신을 쓰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서신은 그러한 외적 핍박보다는 그들 간에 생긴 내부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들 가운데 졸부들이 생겨났고 신앙은 형식화되어 가고 있었고 경제적인 이유로 차별이 생기면서 점점 사랑이 사라지고 있었다.

더 이상 그들은 한 교회에서 교제할 수도 없었고 기독교인들의 결속력도 둔화되어 갔다.

기독교가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공동체가 무너져 갔다.

야고보는 그런 교회를 책망하며 회복되어서 성숙한 모습을 나타내기를 강조한다.

아무리 뜨거웠던 교회라도 얼마든지 세속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야고보서를 읽다 보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기게 된다.

그것은 바울의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된다고 주장하는데

야고보 사도는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라"라고 말해서 겉으로 보기에 서로

상반되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두 사도는 서로 다른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울의 경우는 구원을 얻으려면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는 율법주의자들을 향해 "오직 믿음"을 주장하고 있는 반면에

야고보는 이미 구원받은 자들이 지나치게 행함을 무시하여 믿음을 단지 교리를 인정하는 정도로 생각하고

구원받았지만 삶에서 행위가 믿지 않는 사람들 보다 못하기 때문에 그들을 향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수신자가 바울의 경우는 율법주의자들이고 야고보의 경우는 구원받은 자들이다.

그러기에 바울이 지목하는 "칭의"는 구원의 시작 단계이며 야고보의 경우는 구원받은 자로서 거룩한 삶을 나타냄으로

점점 자라 열매 맺는 영역으로 발전해야 하는 것이다.

즉, 구원의 초기 단계와 달리 믿음을 통해 일어나는 삶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마지막 때에 열매도 없고 행함도 없는 그리스도인 즉, 선데이 크리스천들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이다.

결국 바울과 야고보의 주장은 서로 보완적 역할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의 관점 차이를 신학적 차이를 설명하면,

바울은 "의로움의 전가"를 말하고 있고

야고보는 "의로움의 선언"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야고보서의 메시지는 "행함의 신학"을 많이 잃어버린 현대 교회에 많은 울림을 준다.

야고보서에서 가장 평소에 좋아하는 구절이 있는데 1장 4절에서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나는 이 말씀을 참으로 사랑한다.

왜냐하면 내가 가장 지키기 힘든 성품이 나오기 때문이다.

바로 "인내"이다. 가장 나에게 어려운 인내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가장 인내하기 힘든 순간 이 말씀을 기억하게 된다.

인내를 요구할 때 "아! 주님이 나를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하나 보다!"라며 인내를 하게 된다.

이런 삶 속에서 적절한 말씀이 없다면 나에게 주어진 삶을 끝까지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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