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침 7: 누가 구원을 얻는가? - 마태복음 7장 21-23절

차작가 2023. 11. 2. 11:02

21절 옛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니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3절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도입:

잘못된 확신은 잘못된 길을 가게 만들고 결국에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 온다.

오늘 읽은 마태복음 7장 13,14절에서 예수님은 전혀 다른 목적지로 이어지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많은 사람이 잘못된 도로 위에 있고 오직 소수만이 좁은 길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로를 무작정 달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한 번쯤은 속도를 줄이고 주변을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뭔가 이상하다면 브레이크를 밟고 차를 세운 다음 과연 내가 생명으로 인도하는 도로를 타고 있는지 아니면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지를 꼼꼼히 확인해야 할 것이다. 좁은 길 즉 생명의 길로 가고 있다고 확신하면서도 실제로는 넓은 길 즉 멸망의 길로 가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시는 말씀이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길은 좁은 길이다. 하지만 이 길만이 생명으로 이어진다.

도널드 휘트니는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서 있지 않으면 다른 모든 것을 잘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니 맹목적으로 달려만 가지 말고 잠시 속도를 늦춰 표지판을 둘러 볼 필요성이 있다. 과연 나는 어떤 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 것인가? 혹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서 있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마태복음 7장 21-23절 말씀 오늘 읽은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계속 가르치고 있다.

본문:

21-23: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예수님이 심판의 날 자신 있게 하나님 앞에 섰다가 호통을 듣고 쫓겨날 사람이 ‘더러’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고 ‘많은 사람’이 있을 거라고 말씀하신다. 지옥 행 급행열차를 타고서는 천국 행 열차를 타고 있는 줄로 착각하고 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이 본문에서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살펴 볼 필요성이 있다.

21절 말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과 행동(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을 천국에 들어가고 못 들어가는 차이로 제시하고 계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올바른 식습관과 운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말하면서도 정작 내 자신은 기름진 음식에 더 손이 가고 충분한 운동을 하지 않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신앙인 에게 제일 중요한 건 예배자’라고 말하면서도 조그만 일에도 예배를 등한시 한다면 이 사람 역시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인 것이다.

더 예를 들어, 이런 사람들이 ‘주여 주여’하고 말로만 외칠 뿐 그 말에 어울리는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이다.

행함이 있는 사람인가? 성경 말씀을 비추어 이렇게 살지 않은 예를 들어, 믿음은 단순한 말 이상이다.

예를 들어, 3주 정도 여행을 가기 전에 우리 집 고양이를 어떤 사람에게 맡긴다고 가정해 보자. 고양이의 습성과 관리하는 방법이 아주 자세히 적힌 매뉴얼을 주면서 이대로 해달라고 부탁한다고 하자. (털은 반드시 하루에 한번 빗어 주어야 하고 너무 잘 먹어 뚱뚱해질까 봐서 wet food(can)는 일주일에 하나만 주라는 등등) 그런데 여행을 갖다 와 보니 고양이 형편이 영 말이 아니었다. 털은 한 번도 빗어 주지 않아서 부스스하고 털이 귀를 보니 진드기 때문에 귀에 진물이 나고 can food를 시시 때때로 주어서 그 사이에 뚱뚱한 고양이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어처구니 없어 하는 나에게 그 사람이 그 매뉴얼이 아주 쓸모 있었다고 말하고 군데군데 줄친 흔적을 보여 주는 그 사람을 향해

뭐라고 말할까?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말만 번드르르했지만 말한 대로 행한 흔적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야고보서는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다. 야고보는 성도들이 성경적 믿음을 알고 실천하기를 원하고 있다.

약 2:14-16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오?

천국과 상관없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감정과 믿음을 혼동한다. 하지만 감정은 행동으로 표현되기 전까지는 믿음이 아니다. 텔레비전에서 굶주린 어린아이를 보고서 너무 안됐다고 생각되어 눈시울이 뜨거워 졌다고 해보자. 이름도 모르는 아이에게 모두가 이토록 아파하는 건 아니니까! 라고 생각하니 마음은 조금 뿌듯했지만 이 아이를 위해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면 이것은 성경적인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단순한 감정 이상이다. (진짜 믿음은 그런 아이를 보고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은 행동이 따라야 진짜 믿음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11:30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그래서 야고보는 17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그럼 행함이 있다고 옳은 길에 서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말로만 믿는다고 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행동으로 자신이 좁은 길에 있다는 생각도 그에 못지 않게 위험하다. 천국과 상관없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다시 한번 보자. 22절에서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이 사람들은 종교적 행위와 선행이면 충분하다고 착각하고 있다.

‘당신은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받았을 때 만일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헌금도 가끔씩 하고 또 봉사도 한 적이 있다고 말한다면 십중팔구 그 사람은 천국과는 무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기적을 행함으로 사람을 유혹할 수 있고 또 복음이 증거 되기도 한다.

22절을 읽을 때 마다 생각나는 것이 있다. 나는 귀신을 쫓아내거나 기적을 행하여 병을 고쳐 번 적이 한 번도 없다. 이렇게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한 사람들의 행함도 합격점을 받을 수 없는데 내 행위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어림도 없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요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아무리 큰 업적을 남겨도 그것만으로는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천국에 들어가느냐 마느냐의 요인은 말이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말과 행위도 중요하지만 어디까지나 23절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는 궁극적인 조건은 예수님과의 바른 개인적인 관계이다. 예수님과의 친밀한 앎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착한 말과 행위는 모두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나온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신앙의 행위나 종교적 규칙의 준수나 찬미의 말보다도 서로를 깊이 아는 관계를 원하신다. 이런 관계가 바탕을 이루지 못하면 아무리 대단한 기적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 낸다고 하더라도 허사가 될 뿐이다.

분명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에베소서 2:8)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실족하지 않게 하실 수 있다. (유다서 1:24)

‘1:24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또한 그 무엇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로마서 8:38-39)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 구절은 견인설을 말해 주는 구절이다. 하지만, 성경의 견인설은 한번 구원받으면 무슨 짓을 해도 영원히 구원을 상실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주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견인설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며 따를 때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하신다는 가르침이다.

결코, 택함 받은 자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천국 간다는 교훈이 아니다. 거듭난 자는 반드시 전 생애를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칼뱅의 말처럼!). 성경에 기계적인 견인설은 없다.

육신의 욕망에 따라 살면서 구원을 확신하며 안심하다가는 결국 망하게 된다. 이런 자를 하나님이 견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견인에 관한 가르침을 마치 인간의 책임 회피의 구실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전혀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이 많다는 말씀도 믿는다. 스스로 구원 받은 사람이라는 거짓 확신 속에서 평생을 살다가 심판의 날 천국과는 무관하다는 판결을 받고 어리둥절해 할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올바른길로 가는 줄 알고 열심을 내어 달려 갔는데 결국은 길을 잘못 들어선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열심히 달린 것, 빨리 달린 것 그것 중요하지 않다. 비록 느리더라도 바른 길로 달리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 바른 길을 제시하고 계신다. 구원 받을 자는 좁은 길을 가야 하고 하나님 말씀 대로 살아 행함의 열매를 얻어야 하는데 반드시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다. 심히 달려 가기만 하는 신앙의 질주에서 이제는 잠시 멈춰 서서 우리 자신이 정말 바른 길로 가는지를 살펴 보시길 바란다. 예수님과 하나님을 날마다 바르게 알아가고 또한 바른 관계를 맺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 반드시 구원을 얻길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