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해석:
1. 제자들이 다툼
누가 천국에서 큰 자인가를 두고 다툰다. 이것은 세상적 생각이다.
1) 자신들은 택함 받은 유대인이고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했다.
제자들의 질문은 천국을 높고 낮음의 사고방식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제자들의 천국과에 문제가 있으며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뜻한다. 제자들은 천국이 어떻게 주어지는가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전통적 생각 그대로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 백성이고, 율법을 지켜온 신앙 때문에 당연히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율법을 지키는 노력을 해왔기에 천국은 당연히 자신들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2) 요 4:36-38절에 보면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4: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4:38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라는 말씀을 하신다.
이 말씀에 보면 거두는 사람은 자신이 노력한 것을 거두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영생은 우리의 노력의 대가로 거두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즉 예수님의 노력에 참여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천국의 의미이다. 이처럼 천국은 인간의 노력의 열매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주어진다. 우리가 영생을 얻고 천국에 참여한 자가 되게 하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려 죽고 부활하시는 노력을 하셨고, 우린 다만 예수님의 노력으로 맺어진 열매를 아무 노력도 없이 추수한 것이다. 이러한 천국에서 ‘누가 크냐’라는 문제가 발생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질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혀 알지 못할 때 어떤 사고방식이 나타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3) 천국에선 차등이 있을 수 없는데 왜 그런 오해를 할 수 있나?
천국의 상급에도 차등이 있다고 여기는 것도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의 사고방식과 다르지 않다. 상급의 차등을 주장하는 것도 신앙생활을 자신의 노력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력의 여하에 따라 각기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상급의 차등을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이 십자가의 정신에서 벗어난 사탄의 사고방식이다.
2.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
어린애를 세우시고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1) 천국에서 큰 자를 따지기 전에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가를 말씀하고 계신다.
2)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 어떤 어린아이를 말하고 있나? 4절에서 ‘자기를 낮추는 자’이다. 천국에서는 큰 자 작은 자가 없고 단지 천국에 들어가는 자만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생각이 잘못된 것을 이야기 하고 계신다.
3. 자기를 낯 춘다는 의미
1) 예수님은 천국에서 큰 자를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으로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바꾸어 말하면 천국에서 큰 자가 되려면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 천국에서 큰 자가 되기 위한 방법으로 생각하게 된다.
큰 자가 되기 위해 자신을 낮춘다면 그것은 진정한 겸손이 아니다. 진정한 겸손에는 그 어떤 의도도 담겨 있지 않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아린 아이들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른다. 자신을 높이는 것 또한 모른다. 무엇이 교만이고 무엇이 겸손인가를 모른 채 행동한다. 어린아이는 단지 어른을 바라 볼 때 어른은 나를 지켜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경쟁이나 혹은 착취하는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어른을 보면서 누가 더 큰가 경쟁하지 않는 정신 즉 노력해서 겸손할 필요 없는 정신이 천국 정신이다.
높고 낮음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정신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것이다. 이 점이 어른들과는 다르다
2) 아이의 특성은 자신의 노력과 열심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아이는 자신이 일한 것이 없다. 모든 아이가 부모의 도움과 보살핌으로 살아간다. 물론 아이들 세계에도 분명 차이는 있다. 먹는 것 입는 것의 차이가 존재하긴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부모 덕분에 주어지는 혜택일 뿐이지 자기 노력의 결과물은 아니다. 그래서 다른 아이에게 없는 것이 자신에게 있고 다른 아이보다 잘 산다는 것을 자랑할 수는 있어도 그 모든 것을 자신이 수고해서 얻은 내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따라서 낮춤이란 일한 것이 전혀 없이 하나님이 주신 것을 누리고 살아간다는 마음을 뜻한다. 그리고 이런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5절에서 처럼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할 수 있다.
3)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라고 해도 ‘나보다 작다’라는 의식이 없이 함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는 지체로 여기는 것이다. 이것이 작은 자를 영접하는 것이고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구원을 얻은 성도의 모습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영접한 성도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세상에서 따지는 높고 낮음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은혜로 주어진 십자가를 볼 때 마다 겸손케 되는 모습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낮은 자로 오셔서 낮은 자를 위해서 기꺼이 희생하신 그 십자가의 은혜를 접할수록, 그 은혜가 우리에게 가득할수록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높고 낮음을 따질 수 없는 존재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성도에게 있어야 할 십자가의 정신이다.
4. 예수를 믿는 작은 자를 실족하게 말라 (6절)
1) 그리스도 안의 세계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 따라서 누구든 믿음을 높고 낮음과 연관하여 말한다면 그것은 예수를 믿는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실족하게 하다. Offend. 분노케하다. 기분 상하게 하다. 상처를 주다. 죄짓게 해서 미워하게 하는 것.) 하게 하는 것이고, 그것은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을 정도로 엄청난 악에 해당되는 것임을 말한다.
2) 예수님은 이 심각성을 “만일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8,9절)는 말씀으로 주지시키고 있다.
불구의 몸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낫습니까? 아니면 정상적인 몸으로 지옥에 가는 것이 낫습니까? 신자라면 누구나 전자를 원한다. 그 말은 천국을 위해서라면 육신의 한 지체를 버리는 것도 아깝지가 않다는 뜻이다. 그만큼 육신보다는 천국 문제를 중요하게 여긴다.
이러한 성도는 육신보다는 천국을 더 가치 있게 여긴다. 하지만 천국보다 육신을 더 가치 있게 여긴다면 그는 자연히 육신을 위해 경쟁할 수밖에 없고 경쟁의 결과에 따라 자신보다 작은 자를 업신여기는 인간 됨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5.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10절)
1) 10절을 보면 “삼가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작은 자를 그냥 작은 자로 보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작은 자에게는 천사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대면하는 존재이다. 그러한 천사가 작은 자에게 함께 하고 그를 지키고 보호하고 있다면 작은 자는 더 이상 작은 자가 아니라 존귀한 존재이다.
2) 가진 사람은 자신의 수고와 노력의 결과물인 자기 것으로 자랑한다. 이것이 육적인 사람이고, 이런 사람의 눈에 가지지 못한 사람은 자신보다 능력이 없는 자로 비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성도는 일한 것이 없이 주어진 것에 눈을 돌려야 한다. 자신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주어진 것에 마음을 두고 그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인한 영원한 생명이다.
3) 예수님의 피 흘리심 앞에서 우리 모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죄 용서와 구원을 얻은 존재이다. 항상 죄를 즐기고 죄에 끌려가는 우리를 성령을 보내셔서 다스리시고, 천사가 함께 하게 하셔서 돌보심으로 십자가 앞에 나오게 되었음을 감사하는 그런 존재이다. 이러한 신자의 관계에는 큰 자 작은 자가 없다. 모든 사람이 천사의 보호를 받고 있는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서로를 이러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교회이다.
6.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잃어버린 양 비유를 보자.
12,13절을 보면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전도를 독려하기 위한 내용으로 미화하여 선전하는 경우가 많다. 목자가 길을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헤매는 심정으로 전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씀은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니다.
일단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산에 두고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 목자의 행동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한 마리의 양을 더 귀하게 여겼기 때문이 아니다. 목자에게는 모두가 귀한 양이다. 그러므로 더 귀하고 덜 귀하다는 구분이 있을 수 없다. 때문에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내 버려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선 것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설명하기는 무리가 있다.
양을 귀히 여기는 사랑을 말하고자 한다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산에 버려둘 것이 아니라 안전하게 우리에 넣어두고 잃은 양을 찾아 나선 것이 더 합리적이고 양을 사랑하는 모습에 해당된다.
백 마리의 양 가운데 한 마리의 양이 지니고 있는 실제적 가치는 별로 크지 않다. 즉 효율성을 따진다면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때문에 아흔아홉 마리를 위험에 방치할 수는 없다. 차라리 아흔아홉 마리의 안전을 위해 한 마리의 양을 찾는 일은 잠시 미루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목자에게 한 마리의 양은 단지 가치를 따져 계산할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양이라는 관계를 완벽하게 해주었다. 만약 그 한 마리가 없다면 목자의 양은 백 마리가 될 수가 없다. 즉 한 마리로 인해 백 마리의 의미가 충족된다는 점에서 한 마리는 참으로 존귀하다.
세상은 사람을 가치로 따져 평가한다. 필요한가 필요하지 않는 가로 따지며 필요하지 않는 존재는 가차 없이 도태한다.
세상이라는 구조 안에서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면, 우리 한 사람이 오늘 죽는다고 해도 세상은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미국 국민이 약 3억 정도인데 한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전혀 문제가 없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세상의 계산이다.
하지만 천국은 다르다. 하나님은 천국에 들어갈 자를 모집하고 자격시험을 쳐서 합격 여부를 따지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애당초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 가운데서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택한 그들을 부르셔서 오직 은혜로 구원하시는 방식으로 천국을 채우신다. 그러므로 천국은 하나님이 채우기로 정하신 그 수가 채워지는 것이 곧 충만이고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
그런데 만약 하나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하나를 잃은 상태에서 단지 아흔아홉으로 기뻐할 수 있을까? 아흔아홉이 있다고 해도 하나가 없음으로 인해서 천국은 충만을 잃게 된다. 그래서 천국은 숫자를 따지는 곳이 아니다.
‘별 볼일 없는 너 하나는 없어도 된다’는 것은 천국이 아니다. 때문에 작은 자 하나를 업신여기는 것은 천국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고 천국 정신과도 상관이 없는 것이기에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교회와 천국 정신
교회는 천국 정신으로 모이고 천국 정신이 무엇인가를 나타내고 증거해야 한다. 그 중에 하나가 작은 자를 업신여기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작은 자라고 해서 무시하지 말라는 윤리적 문제가 아니다. 비록 작은 자라고 해도 그 하나가 없음으로 인해서 내가 온전하게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관계이다.
우린 때로 어떤 사람에 대한 불쾌한 마음으로 인해서 그가 떠났으면 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교회에 불필요한 존재로 여겨진다면 그런 마음은 더 강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한 것이다. 천국에서 한 사람이 단지 숫자 하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완전케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아무리 작은 자라고 해도 그가 있음으로 천국이 완벽히 채워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작은 자는 없다. 모두가 하나님의 기쁨이되는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가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가 있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충만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을 아는 것이 천국 정신이다.
우리에게 천국 정신이 살아있는 그것이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처럼 천국 정신이 살아있는 사람이 되게 하고자 한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오늘 제목처럼 작은 자를 영접하고 실족하게 하지 않는 복된 우리가 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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