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입:
인생의 밑바닥까지 떨어져 삶의 희망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던 때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그때 어떻게 하셨나요? 아니면 지금 소망 없는 가운데 계시나요? 오늘 본문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려움에 처할 때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 주시는 말씀입니다.
1. 12해 동안 혈루증을 앓아 온 여인
1) 먼저 혈루증은 부인과 질병으로 종교적으로 부정하다고 여김 받은 병이다. 레 15:25~26절을 보면
레 15:25-26 ‘15:25 만일 여인의 피의 유출이 그의 불결기가 아닌데도 여러 날이 간다든지 그 유출이 그의 불결기를 지나도 계속되면 그 부정을 유출하는 모든 날 동안은 그 불결한 때와 같이 부정한즉 15:26 그의 유출이 있는 모든 날 동안에 그가 눕는 침상은 그에게 불결한 때의 침상과 같고 그가 앉는 모든 자리도 부정함이 불결한 때의 부정과 같으니’
이것은 불결한 것으로 취급되는 병이었다. 피의 유출이 있는 동안에는 그가 앉고 누웠던 모든 자리가 부정하고, 그 자리를 만지는 사람도 부정해진다는 것이 율법이다. 따라서, 율법상 그 여인은 불결한 사람이었다.
2) 12해 동안 혈루병을 앓아 왔던 여인의 마음을 생각해 보자.
그 누구도 가까이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만지기도 불가능 했다.
나이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평균수명이 40세 정도임을 감안하면 어른이 된 이후 부터 평생 동안 병에 시달린 것으로 보인다. 처녀 때 부터 병이 들었다면 결혼도 못하고 사회로 부터 격리되었을 것이고 만일 결혼 한 후에 병을 얻었다면 분명 이혼 당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외로운 인생을 살았음을 직감할 수 있다. 이점을 생각해 보면 이 여인은 혈루증을 앓는 12년 동안 사람을 가까이 할 수 없었고, 다른 사람들 또한 이 여인을 불결하게 취급하며 가까이 하지 않는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했다고 한 것을 보면 당시 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었던 것 같다.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당시에 의술 수준은 형편 없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치료 방법은 주술적인 치료방법이었다. 서로 다른 방법에 적응하지 못했을 것이고 효과도 없어서 아마도 많은 괴로움을 당했을 것이다.
이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치료는 공짜가 아니므로 치료 받을 때 마다 돈이 들어갔을 것이다. 그래서 온갖 치료를 받느라 물질을 허비 했을 것이다. 심신이 약해지고 가진 돈도 떨어지니 그 병이 중하여 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정도의 상태라면 포기 할 수 있었을 텐데 아마 마지막 희망을 갖고 전승에 따르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가버나움까지(약 24km-하룻길을 꼬박 걸어서) 온 것으로 추측된다. 그 만큼 먼 곳에서 부터 예수의 소문을 듣고 희망을 갖고 예수를 만나러 왔다. 이런 간절함 과 사모함이 나중엔 기적을 일으키는 기초가 되었다. 신앙의 열심이란 간절함에서 시작된다.
2. 이 여인이 드디어 예수를 보게 된다.
예수님이 무리 가운데 계셔서 가까이 가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 가까이 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 27절에 나온다.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그의 옷에 손을 대고자 어떻게든 예수님께 가까이 가고자 했다.
그런데 뒤로 가서 옷에 손을 대고자 했다. 왜냐하면 몰래 만지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불결한 여인이 손을 댄 것을 알면 그 상대방도 불결해 진 것을 알고 화 낼까봐서 였을 것이다. 여인이 예수님의 뒤로 와서 몰래 옷을 만진 것도 사람들 앞에 떳떳하게 나설 수 없는 자신의 처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 왜 손을 그 옷에 대고자 했을까? 그 이유는 28절에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했다’를 보면 구원을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구원은 죄에서 구원 받은 속죄의 개념 보다는 병이 낫다는 의미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어떤 거룩한 사람의 옷은 치료하는 힘이 있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성경 몇몇 곳에서 이런 비슷한 상황이 나온다. 행 19장에 보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당시의 만연된 생각 때문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간절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3. 그런데 실제로 옷에 손을 대었더니 병이 나음을 깨달음 (29절)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피 흐르는 것이 멈추었다. 생각대로 기적이 일어났다.
4.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 (30절)
1) 예수님은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셨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healing의 source 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전달하는 힘이 바로 믿음이다.
그리고 접촉의 필요성을 알 수 있다. 전기를 필요로 할 때 우리는 전자 장치에 있는 전선을 콘센트에 꽃 아야 한다. 전선을 콘센트에 꽃지 않으면 전기를 얻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모든 파워 모든 권세의 source 이시다. 그 분의 능력을 받을 전달 받으려면 그분과 연결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곧 믿음이라는 것이다.
2) 이 여인은 모든 희망을 예수님께 두었다. 자기 같이 불결하고 부정한 사람을 치유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라고 믿고 그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왔다. 그리고 감히 시도 조차도 못할 것 같은 행동을 함으로써 예수님의 옷 자락을 만졌다. 그 때 예수님의 능력이 그녀의 믿음을 통해서 그녀의 몸에 전달되어 치유되는 기적을 맛보았다.
3) 우리가 왜 생활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는가? 첫번 째는 간절함이 없다고 했고 두 번째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믿음을 가질 때 많은 장애물들을 만난다. 이 여인이 이런 믿음을 갖고 실행에 옮기기 까지 많은 장애물들을 극복해야 했다. 멀리 떨어진 곳에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그 먼 길을 그 아픈 몸으로 여행을 해야 하는 장벽이 있었고 또 사람들이 부정하다고 여기는 몸으로 많은 군중들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장벽이 있었다.
좌절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믿음으로 나아갈 때는 많은 장벽들을 이겨야 하는 것이다.
5. 여인의 고백 (32절)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두려운 이유는 불결한 자가 거룩한 분을 만졌으니 자신에게 화를 낼까 봐서 였을 것이다.
모든 사실은 왜 옷 자락을 만졌는지 이유를 말했을 것이다. ‘만지기만 하면 나을 것이라는 믿음’도 이야기 했을 것이다.
6. 여자의 고백에 대해 예수님의 반응은? (34절)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왜 예수님이 자신의 옷을 만진 여인을 찾으셨는지 이 대목에서 우린 알 수 있다.
1) 우선, 그 여인을 위해서였다. 그녀가 가진 믿음이 옳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의 옷자락에서 나오는 능력이 고쳐 준 것이 아니라 너의 믿음이 너를 고쳤다는 것을 확인해 주시고 계신다.
사실 이 여인의 혈루증이 고침 받은 것은 조금은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병자를 고쳐주신 것을 보면 대개 고침 받기를 원하는 병자들의 요구와 함께 예수님의 직접적인 말씀과 행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님 몰래 옷을 만졌고 그 결과 예수님에게서 능력이 나와 고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규례대로 한다면 이 여인은 이미 불결한 존재이기 때문에 구원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런데 예수님에게서 능력이 나와 여인의 병이 고침을 받게 된 것이다. 당시 예수님이 옷을 만진 사람은 이 여인만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 가운데 오직 이 부정한 여인은 예수님의 능력으로 고침을 받았다. 혈루증을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인간의 부정함은 어떤 인간적 방법이나 수단으로도 해결할 수 없음을 뜻한다. 오직 예수님의 능력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정한 우리에게 구원의 능력으로 보내셨다. 그런데 세상은 예수님의 구원의 능력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온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껏 자신들 스스로 잘 살아왔기 때문에 예수 없이도 생활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이 예수님을 대하는 방식이다.
가버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고 기다렸다. 하지만 그들은 혈루증 여인처럼 부정한 사람들이 아니라 나름대로 온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이 자신의 부정함을 고칠 수가 있다고 생각하고 환영하고 기다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의 덕을 보고자 하는 것이었을 뿐이다.
결국 이들도 예수님의 구원의 능력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애당초 구원과는 상관없이 예수님께 몰려든 것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밀려들어서 예수님을 만졌지만 그들에게는 능력이 나가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의 부정함을 알고 예수께 나온 사람만이 그 능력 아래 있게 됨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이것을 여인의 믿음이라 하셨다. 즉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예수님의 능력으로만 부정한 우리가 깨끗하게 된다는 고백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사람 앞에 자신의 모든 공로와 의는 무너지게 되어 있아 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을 확인해 볼 수 있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은 여인을 향해 ‘딸아’라고 부르셨다. 성경에서 딸은 시온, 또는 예루살렘을 지칭하기도 한다. 즉 고침 받은 이 여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진정한 이스라엘이라는 뜻이다. 즉, 그가 바로 자신의 부정함을 알고 오직 예수님의 능력으로만 고침 받을 수 있음을 믿고 주께 나오는 믿음의 사람인 것이다.
구약에서 혈루증은 부정한 병으로 취급되었다(레 15:2). 그러므로 혈루증이 있는 여인은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도 없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었다. 이처럼 구약에서 부정한 자는 하나님에게서 쫓겨나야 했지만 예수님이 함께 하신 세계는 오히려 부정하고 더러운 자에게 함께 하시는 새로운 세계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혈루증 여인의 이야기이다.
새로운 세계는 악하고 부정하고 더러운 자들이 얼마든지 주님께 나아가서 그 옷을 만질 수 있고 깨끗함을 얻는 세계이다. 이것이 부정한 자를 깨끗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세계이다. 성도는 바로 이 세계에 속해 하나님의 참된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부요하게 된 성도의 삶이다.
그리고 예수님께 나오는 성도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정한 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부정함을 잊은 채 예수님을 찾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환영하고 기다렸으나 구원의 능력에는 관심이 없는 가버나움 사람과 다르지 않다. 예수님 앞에 나오게 되면 드러나는 것은 우리의 수치, 더러움으로 인한 부끄러움 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예수님이 나의 구원의 능력 되심을 믿으며 인간의 의나 선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들여다보면 도무지 믿음이 있다고 말하기가 부끄러울 지경이다. 마귀의 유혹으로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며 내 자존심과 배부름을 위해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우리에게 말씀으로 찾아오시고 부끄러움을 보게 하심으로 예수님만이 구원의 능력 되심을 믿게 하시는 이것이 우리를 살리시기 위한 예수님의 일이다.
2) 또 대중들을 위해서였다. 진짜 고침 받았다는 것을 선포하심과 동시에 고침 받은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녀의 믿음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그녀와 같은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오라는 것을 말씀해 주시길 위해서였다. 그리고 진짜 구원자가 누구인가를 알려 주시기 위해서였다.
왜 예수님을 만나는데도 변화가 없을까? 그것은 군중과 여인의 차이점에서 알 수 있다. 똑같이 예수님을 만났는데도 똑같이 예수님을 만지는데도 그 여인에게만 기적이 일어 났다. 왜냐하면 믿음의 차이 때문이다.
이 여인처럼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손을 뻗쳐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그 자비하심이 우리의 어려움(육체적, 정신적)에 전달되어 해결되기를 기대해야 한다.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12년 동안 거의 죽은 존재로 살아온 여인에게 생명과 같은 말씀이다. 병에서 자유롭게 되었으니 건강하라는 것이다. 이 사건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을 만짐으로 치료함을 받게 된다. 6:56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결론:
아무리 힘들어도 오직 우리의 유일한 소망되신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아 가야 한다. 그러면 평강의 예수님이 믿음으로 나아 온 우리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다. 응답은 공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주어진다. 예수님의 능력을 믿으면 능치 못할 일이 없다.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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