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묵상

하나님의 의 - 로마서 3장 21~31절

차작가 2023. 12. 22. 12:18

사도 바울은 1장 18절부터 3장 20절까지 아주 길게 인간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과 추악함을 폭로해 낸다. 인간들은 율법으로도, 양심으로도, 심지어 말씀을 가지고도 죄만 생산해 내는 추악한 시체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며, 그 발은 피 흘리는 데에 아주 빠른 좀비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우리에게서도 그러한 좀비의 모습이 똑같이 보일 때가 너무 많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모든 아담 군상들은 죽은 시체들이다. 그래서 다 지옥에 가야 맞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대 반전의 현실을 만들어 내셨다. 그렇게 다 죽어야 마땅하지만 그중에 어떤 자들을 위해 대안을 마련해 놓으셨다는 것이다.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 성경에서 이미 증거 되어 있던 ‘하나님의 한 의’다.

그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로로 하여 그 대상에게 입혀지게 된다.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주어지게 되는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들의 성숙의 정도나 깊이 등에 상관없이 ‘차별이 없느니라’의 모습으로 주어진다. 자격이나 됨됨이에 따라 다르게 주는 것을 상이라고 하고, 차별이 없이 값없이 주는 것을 선물이요 은혜이다.

성경:

21절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 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 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27절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절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절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절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절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해석:

1. ‘하나님의 한 의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았다’는데 그 증거는 무엇일까? (21절)

구약성경. This righteous plan is witnessed by the Law and the Prophets. It was foretold in the types and shadows of the sacrificial system that required the shedding of blood for atonement. And it was foretold by direct prophecies (see, e.g., Isa. 51:5, 6, 8; 56:1 Dan. 9:24).

2.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는 것은 무슨 뜻 인가?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한다. 그 말은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존재도 될 수 없는 상태였음을 말해준다. 그렇게 자신의 영광과 가치를 챙기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떠나 있는 상태를 죄다. 그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생명력(루아흐), 즉 성령이 떠나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걸 바울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늘 항존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의 자리로 내려가 하나님의 생명력을 받는 것을 자존심 상해하며 거부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과 하나님 되심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아볼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인정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모두가 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며 살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라는 의미는? (24절)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인간이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의인이 된 것이 아니라 의롭다 여김을 받았다는 것에 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마치 내가 의를 소유한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의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 아니라 의인되신 예수님을 믿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의인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주와 함께 의 속에 포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의인되었으니까 의인으로 살아야 할 것이 아니냐?'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의인의 행동을 하려고 하는 오류를 범한다.

4. 예수를 ‘화목제물로 세우셨다’는 의미는? (25절)

화목제물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 ‘힐라스테리온’은 법궤 위의 시은 좌, 속죄소를 가리키는 단어다. 그 단어는 성경에 딱 두 번 나오는 단어인데 그걸 개역 성경이 화목제물로 번역했다. 그 단어는 속죄소를 가리키는 단어다. 그리고 ‘세우셨다’라고 번역이 된 ‘프로티떼미아’라는 단어는 ‘set before, ~앞에 세우다’라는 뜻이다. 개역 성경은 그것을 ‘화목제물로 세우셨다’라고 간단하게 줄여 의역을 해 놓았는데 그걸 지성소의 구조와 법궤와 시은 좌의 형태와 기능과 역할을 참고하여 그 부분을 직역을 해보면,

‘하나님께서 이 예수를 시은 좌 앞에 세우셨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의 피 안에서 성취된 믿음에 의한 것이었다.’가 된다. 왜냐하면 믿음이라는 단어 앞에 쓰인 전치사가 ‘디아’로서 ‘~에 의해서’라는 의미이고 피 앞에 쓰인 전치사는 ‘엔’으로서 ‘~안에서, 그 안에서 성취된’이라는 의미의 전치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가 일어나는 유일한 장소인 시은 좌 앞에 세우셨다(set before)는 것이다. 그건 그 시은 좌 밑의 인간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과 추악함이 예수에 의해 가려져 있다는 뜻이다. 그 말은 다른 말로 예수의 피가 그 시은 좌를 덮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떻게 그러한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나타난 예수의 믿음에 의해 그 일이 성취가 되었다는 그런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일을 벌이신 이유를 25절 후반부에서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인간의 죄를 그냥 지나가심(파레시스)으로(유월절), 당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의, 디카이오수네’의 의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그 관계가 요구하는 것을 성실하고 완벽하게 수행해내는 상태를 의라 한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을 바탕으로 25절을 다시 번역을 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신실하심을 나타내시기 위해 당신 백성들의 죄를 그냥 지나치시는 값없는 구속을 계획하셨는데 그 값없는 은혜의 구속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여 성취되었다. 그 모습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시은 좌 앞에 세우시는(set before), 하나님의 열심의 모양으로 나타났다.’ 이다.

5.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지 않고 굳게 세운다는 의미는? (31절)

애당초 율법은 지키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달아라고 주어졌다. 즉 율법을 통해서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행함을 통해서 의를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로 여김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라는 것이다. 이것이 율법이 주어진 의도이다. 그렇다면 율법이 주어진 유대인도, 율법이 주어지지 않는 유대인도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드러났다면 그것은 율법이 의도한 바가 명백히 드러난 것이다. 이것이 율법을 폐한 것이 아니라 굳게 세운다는 의미다.

율법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이끌기 위한 징검다리라는 것을 알고 예수의 의만 꼭 붙들게 되는 을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이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적용:

행함, 은혜 그리고 믿음 이 세 가지 단어를 가지고 우리의 바른 신앙 고백을 적어보자.

그러나 믿음도 의도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린 단지 믿음 안에서, 의안에서 살아갈 뿐이다. 이것을 은혜라고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행함에 대해서 미련을 버릴 수밖에 없다. 행함을 통해서 믿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어리석음에서 떠나야 한다. 의가 되지 못하는 인간의 행함에서 어떻게 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까? 내 쪽에서 뭔가 행위가 있어야 하나님의 일이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믿음이 있는 모습이라는 생각은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믿음 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