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부터 시작한 창세기 묵상이 오늘로 끝난다.
오늘 묵상한 41장에서 50장 말씀은 형제의 화해, 용서, 야곱의 죽음까지 여러 스토리로 이어진다.
그 스토리 못지않게 많은 것을 깨닫게 했다.
이번 창세기 통독은 무엇보다도 성경을 다양한 각도로 묵상하는 방법을 알게 하셔서 의미가 있었다.
오늘은 그중에도 특히 42장 1절에서 4절 말씀의 "한 사건"을 통해서 또 다른 각도의 묵상의 포인트를 주셨다.
지난 장에서는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석함으로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그 꿈대로 7년의 풍년과 7년의 흉년으로 말미암아 이집트뿐만 아니라 그 인근에 있는 땅까지도 기근으로 인해
먹을 양식이 없어서 온 땅이 굶주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그 일대의 각국 백성들이 양식을 얻기 위해 애굽으로 들어가서 요셉에게 나아왔다.
그렇지만 요셉의 형제들은 성경에서 보면 양식을 구하러 가지 않았다.
42:1 그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42:2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 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
야곱은 아들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라고 말한다.
인근에 있는 백성들은 애굽에 양식이 있다는 소문을 들어서 다들 애굽으로 가는데도 불구하고 70명이나 되는 대가족이 식량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는데도 아무도 가지 않고 서로 바라만 보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한 구절을 읽으면 아! 그들이 가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요셉을 웅덩이에 가두어서 애굽으로 가던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았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애굽 자체가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되었던 것이다.
애굽 어딘가에 노예로 살고 있을 요셉을 자신의 아버지에겐 짐승에 찢겨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고 그 거짓말로 인하여
자신의 아버지 야곱이 스올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 때문에 그들에게 어쩌면 애굽이 금기어였을 것이다.
처음에 아버지가 슬퍼할 때 용기가 없어 말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가면서 더 그 이야기를 되돌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애굽이라는 그 자체가 그들에게는 자신의 죄를 떠올리게 하고 무덤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찔림은 자식들이 먹을 양식이 없어 배가 고파도 갈 수 없을 정도로 큰 죄책감의 무게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야곱은 "왜 너희들은 애굽에 있는 곡식을 사러 가지 않느냐? 양식이 없으면 죽는다는 것을 모르냐"라고 말하는 것이다.
42:3 요셉의 형 열 사람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
42:4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은 그의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생각에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야곱의 말에 그들은 모두 애굽으로 곡식을 사러 내려갔다.
그런데 야곱은 베냐민을 보내지 않는다.
과거에 아들들이 세겜에서 양을 칠 때 요셉에게 심부름을 보냈지만 피 묻은 채색 옷만 돌아왔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여곱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목자로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라반 삼촌 집에서 라헬을 얻기 위해 목자로서 양 떼를 쳤고 또 양 떼가 동물에 의해 찢긴 것을 많이 본 목자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성경에 보면 찢긴 양은 야곱의 것으로 삼촌에게 배상한 것이 여러 번이라는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게 애지중지하게 채색 옷을 입혀 키운 요셉을 평생 목자로 살아온 야곱이 위험한 곳에 보낸 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아마도 최소한 그 지역은 안전했기 때문에 보냈다고 생각이 든다.
그리고 사나운 짐승에게 요셉이 찢겼는데 채색 옷은 찢긴 상태가 아니고 단지 피만 묻어 있었다.
그러므로 요셉이 찢겨서 죽었다고 판단하기는 다소 무리가 있다.
야곱이 경험한 자신의 아들들은 세겜 성에 있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은 후 가장 고통이 심한 삼일 경에 칼로 그 성에 있는 모든 남자들을 죽이고 심지어 약탈까지 한 아들들이었다.
다소 겁이 많은 야곱의 성품으로는 심증은 있지만 살인까지 한 아들들에게 요셉에 대해서 묻기가 두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신이 애굽으로 같이 가지 못하는 이 상황에서 베냐민을 그 형들과 보낸다는 것은 과거의 기억을 생각하게 했을 것이고
야곱은 베냐민까지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을 것이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요셉이 있다.
형제들은 요셉에 대한 죄책감으로 두려웠고 야곱은 요셉의 일로 다른 아들들을 믿지 못하는 불안감이 있었다.
이 가정은 이렇게 서로가 곪을 대로 곪아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고 더군다나 야곱은 자신의 아들들을 아들이라 생각하지 않고 두려움의 대상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 과정 속에 10형제가 애굽으로 곡식을 사러 가는 것이다.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고 난 후 몇 년 후에 일어난 사건인지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애굽으로 가야만 이 가정의 곪아있는 상처가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서로 바라만 보고 있어서는 문제 해결이 안 된다는 점이다.
애굽으로 가야만 형제들은 자신들의 죄를 정면으로 볼 수 있게 되고 또 자신의 죄를 고백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야곱도 마찬가지였다.
아들들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는데 자기 생각으로만 판단하지 않았는지 검증이 필요했다.
그래서 오해 한 부분이 있다면 오해를 풀고 아들들에게도 아버지로서 아들들의 아픔도 받아들이는 부분이 필요했다.
그 시작을 여는 것이 바로 애굽으로 가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아들들처럼 서로 바라만 보고 있을 때가 많다.
가만히 앉아 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문제의 중심인 애굽으로 가서 문제를 그대로 직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만약 그 형제들 중에 누군가가 지나가는 상인들에게 애굽으로 팔려간 동생을 찾으려는 노력을 했다든지
그리 멀지 않는 이 거리를 몇 번씩 방문도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후에 전개되는 내용으로 보아 그들은 감히 애굽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의 일이니까 우리도 왜 저랬을까?
판단하기는 쉽지만 이런 엄청난 일을 하면 누구나 패닉이 오고 방향 감각을 잃기 쉽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내가 직면해야 하는 문제가 무엇인가?
나의 애굽은 어딘가를 질문하는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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